인생사 새옹지마 feat. Flu season의 약국이란.
약사 직능은 나라마다 다르다. 이해관계나 규제상황의 영향도 받지만, 무엇보다 보건의료 환경과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캐나다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가 조금 더 넓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독감, COVID-19 외 기타 예방접종 (vaccination) 및 근육주사로 투여되는 약물을 투약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캐나다 기준으로 10월부터 4월까지가 독감 유행(가능) 시기이고, 10월 중순께가 되면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 이때를 "Flu season"이라고 부르는데 연중 가장 바쁜 기간이다. 참고로 내 입사일은 10월 1일.
일을 시작하자마자 분위기가 묘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해맑은 난 11시간 동안 주로 서서 (80%) 근무하는 일정 자체가 힘들 뿐이었건만 같이 일하는 어시스턴트 할머니의 신경질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특히 전화가 올 때, 더욱이 그 전화가 "독감 백신 언제 들어오냐"라고 묻는 것일 때. 2주 동안 눈칫밥 먹어가며 일이 좀 손에 익나 싶었더니 드디어 첫 백신이 배송되었다.
매장 규모가 크다면 나았을까? 여하튼 우리 약국은 하루에 근무하는 약사는 달랑 1명이다. 어시스턴트가 두 명 세 명 붙어도 결국 내가 모두 해내야 하는 일들이 한가득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여긴 아직도 COVID-19 백신을 맞는데 정부 클라우드 서버에 접속해서 이전 접종 이력을 확인하고 접종 후 다시 기록을 업데이트하고, 환자한테 이메일로 접종 기록을 보내는 일까지 해야 한다. 백신 업무가 아니어도 겨울이 되면 자연스레 환자가 늘게 마련이라 -이건 아마 한국도 마찬가지- 처방전 자체도 늘어나고 감기 기운으로 감기약을 찾는 사람들도 덩달아 늘어나고, 그리고 백신까지 담당하려니 입에서 단내가 났다. 20년 차 노련한 어시스턴트 할머님이 루틴 한 일들을 척척 처리해 주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비자 스폰이고 뭐고 내가 먼저 못하겠다고 내뺄 뻔했다.
그러면서 묘하게 안도하게 됐는데. 내가 일이 좀 서툴러도 티는 별로 나지 않겠구나 싶었다. - 당시에는 주말에 근무하는 어시스턴트가 없어서 된통 고생했을지언정 내가 오지 않으면 그마저도 없는 것이 아닌지! 나는 당당하다..- 일이 다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폭탄을 맞은 격이라며 어시스턴트들마다 나를 안쓰럽게 여겼는데, 속으로 인생사 좋고 나쁨이 언제나 함께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슬몃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찌 됐든 내 프로베이션 기간은 1월까지면 끝이고 나는 안전하리라.
지금 생각하면 이 무슨 가학적인 정신승리인가 싶긴 하다. 내 나라를 떠나 낯선 땅에서 소수 인종이 되고, 급여 노동자로 녹을 먹는 처지이고 보니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나 자신이 그만큼 작아졌던가. 이 바빴던 시기가 나에게는 전화위복처럼 다가왔다는,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때 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