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장고를 뜯어본 건에 대하여.
갑자기 냉장고에서 드드드득 하고 뭔가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건만 우린 냉장고가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기는 하니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어느 날부턴가 냉장고 속 생태계 (aka 진균생태계)가 전보다 잦은 빈도로 형성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테면 블루베리 꼭지에 이틀 만에 곰팡이님이 자리 잡으시고, 애호박은 하루 꼬박 넘기면 물러졌으며, 염도의 끝판왕 명란젓이 상하는 사태 발생. 어쩐지 냉장고가 덜 시원한 것 같아서 방에서 쓰던 온습도계를 하룻밤 넣어뒀었다.
OMG.. 냉장고가 9℃잖아.
평생 보실 일 없었을 <대한민국 약전>이라는 책이 있다. 엄청 두꺼운데, 거기에는 약품의 제형이나 보관조건 같은 총론부터 의약품 품질관리를 위한 기초실험법 각론까지 빽빽하다. 의약품의 보관조건은 이 대한민국 약전의 총론에서 온다. 실온보관 1-30℃ 상온보관 15-25℃, 냉동 조건은 -18℃ 이하, 그리고 냉장조건은 2-8℃. 그렇다. 우리 냉장고는 '냉장보관'의 기능을 상실했던 것이다. 만약 의약품 냉장고였다면 대번에 온도일탈 보고를 해야 할 판이다.
캐나다에는 사람이 직접 찾아오는 A/S라는 것이 없다. 한국에서 TV를 사면 직원분이 박스채 고이 들고 방문 오셔서 받침대에 올려둘지, 벽에 걸어둘지, 물어보시기까지 한 다음 설치를 해주고 가시는 반면 이곳에선 집 앞까지 배달만 해줘도 감지덕지다. 실제로 첫 티브이 산 날에 내가 경비실 앞까지 내려가 티브이를 들고 왔었어야 했다. 고장 났을 때? 전화를 '사람이' 받기만 해도 다행이다.
우리는 검색에 돌입했다. 유튜브와 챗지피티를 활용한 결과, 냉장고 뒷면에 냉각팬이 있는데 배수가 원활하지 않아 그곳에 물이 고였다 얼어버리면 팬이 돌지 않고 냉기가 냉장고 안으로 전달되지 않으므로 냉장고 안 온도가 올라간다고 한다. 우리가 들었던 드드드드득 하는 소리는 얼어버린 냉각팬이 마지막으로 지르는 비명이었던 셈이다.
유튜브를 찍어 올린 친절한 분은 캐나다인 아버지였는데, 냉장고 뒤판을 분리해서 그 안쪽 냉각팬과 코일의 얼음을 헤어드라이어로 녹이는 작업을 5살짜리 아들과 함께 하셨다. 무려 분리하는 작업을 아들에게 시키셨다는. 조기교육이 이렇게 무섭다. 살짝 겁은 났지만 방법이 없기에 우리도 냉장고를 모두 비우고 수리 작업에 나섰다. 뒤판을 열어보니 살아남은 것이 용하다 싶게 꽁꽁 얼었더라. 헤어드라이어의 열기는 부족해서 냉장고를 열고 두세 시간 두었더니 드디어 녹아내렸다. 재조립 후 확인한 온도는 훌륭하게도 2℃!! 성공이다!! - 아니다, 흥분하지 말자. 이런 성취감은 두 번 다시 필요치 않으니 냉장고님 이사 나가는 날까지 부디 무사하소서.
나는 도회적인 삶을 지향하는데, 캐나다에 살면 목공, 수리, 정원일을 배워야 할 것 같으니 한숨이 나온다. 좋은 것이 있으면 현타 퍽퍽 맞는 날도 있는 거니까. 내 좌우명인 '인생사 새옹지마'를 다시금 새겨본다.
추가로, 우리가 느끼는 대기업 가전의 최대 장점이 A/S인데 북미에서는 그 장점을 누리기가 매우 힘들다. 거리상 불가능하기도 하고 인건비도 맞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약간 맛보기라도 해주면 여기 사람들 줄 서서 살 것 같은데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