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귀를 쫑긋하더니 잠깐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았지. “고모야, 그동안 잘 있었어?”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네 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 장난감을 두드리는데만 집중했어. 오랜만에 만나 더 그랬을 거야. 훌쩍 커버린 키에 야윈 몸, 앳된 티를 벗은 억센 얼굴, 군데군데 자리 잡은 색 바랜 머리카락. 서른을 넘긴 너에게 그동안의 시간이 바람 든 무처럼 숭숭 뚫려 있었어.
너는 종일 몸으로 바닥을 치거나 물건을 두드리며 소리에 묻혀 지내지. 그것이 너를 표현하는 전부이니까. 박자에 따라 신이 나기도 하고 심드렁해지기도 하고, 너에게 오묘한 세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리 없지. 세상을 향한 너의 두드림은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게 만들 뿐이었어. 아파트 위층에서 일층으로, 결국에는 도심에서 밀려나 교외로 거처를 옮겼지. 그곳에선 그나마 마음껏 소리를 낼 수 있었어.
잘 자라던 네가 이상 증상을 보인 것은 백일잔치를 하던 날이었어. 소리 내지 않고 벙긋거리기만 하던 네가 밤새 자지러지게 울어댔어. 크는 자랍이려니 예사롭지 않게 여겼는데 검사 결과는 뜻밖이었어. 그러고 보니 너는 그때까지 고개를 잘 가누지 못하고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았어. 늦둥이로 태어나 그저 늦되는 줄로만 알았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한겨울에 훈훈한 바람을 안고 태어난 너는 정작 봄을 맞으며 집안에 호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어.
그날 이후 엄마 아빠는 온통 너에게 매달렸지. 용하다는 곳은 어디든 달려갔어. 진단을 잘 못 한건 아닌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온전해지지 않을지, 가망 없는 희망을 놓지 못했어. 시간이 지나도 기대하던 변화는 오지 않고 뇌세포를 죽인다는 경기는 갈수록 심해졌어. 보는 사람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을 잘 못 자도 물오른 나무처럼 키는 쑥쑥 자라났어. 자랄수록 아빨 쏙 빼닮아 갔지.
엄마는 덩치가 커가는 너를 데리고 지성으로 재활치료를 다녔어. 굳은 몸을 구부릴 때마다 고통으로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문밖에서 고스란히 듣고 서 있었지. 그 시간들이 엄마를 화석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나 봐. 엄마는 무장한 전사처럼 힘든 내색이나 하소연 한번 하지 않았어. 말수가 적고 감정을 쉬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 네 앞에서만은 수다스러웠어. 세월에 아랑곳 않고 세 살 아이로 멈춰있는 내게 강아지라는 애칭을 입에 달고 살았지. 그것이 엄마와 너의 유일한 소통 법이었는지 모르겠어. 넌 학교에 갈 무렵에야 비척비척 걷기 시작했어.
엄마 몸에 이상이 생긴 걸 너도 알았을 거야. 네가 약 부작용과 합병증으로 몇 번의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엄마도 덩달아 시들어갔으니까. 속에서 열이 나고 가슴이 떨리는 불안증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음식을 넘기지 못했지. 검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 했지만 허깨비처럼 점점 말라갔어. 신경정신과 진료를 보러 간 날 엄마가 넋두리하듯 툭 내뱉었어. “아이를 데리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배냇병신’이라 하더라고. 그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던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침묵한 세월 동안 제일 걸려있던 말이었나 봐. 쏟아내고 싶은 것이 비단 이뿐이었겠어. 악다구니라도 써대며 걸린 것들을 토해내면 속이 좀 후련했을 텐데. 누구의 잘못이 아니란 걸 엄마는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내가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너는 여전히 장난감 전화기 버튼을 눌러댔어. 곁에 있는 엄마를 알아보기나 할까 의심하는 내게 보란 듯 엄마 무릎을 끌어다 베고 눕더라. 아저씨 같은 네게 여전히 강아지~하고 부르는 엄마 얼굴이 신산해 보였어. 그런 엄마 눈을 스치듯 바라보며 네가 타타타타 빠르게 박수를 쳐댔어. 엄마를 향한 위로 같기도 하고, 응원 같기도 하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이었는지 모르겠어. 창문으로 파고드는 햇볕이 따스한 봄날이었거든. 정말 엄마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은 너의 몸짓이었을까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어.
그날 넌 경기로 넘어져 눈썹이 찢겨 있었어. 너는 매일 겪고 있는 일인데 호들갑을 떨 수 없어 울음을 꾹꾹 눌렀었지. 이제는 너와 함께 보낸 서른다섯 해의 시간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거야. 그곳에선 아프지 않고 지낼 거라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놓여.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우리 성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