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뱀처럼 길고 매끄러운 몸체가 선로 위를 미끄러지며 다가왔다. 매번 타는 기차가 오늘따라 낯설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거부감에 멈칫 물러났다 이내 열린 입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7호차 14번 A석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짐을 풀 새도 없이 다음 역에 도착했다. 승객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일행인 듯한 중년의 남자 둘이 내게 다가와 자리가 맞는지 물었다. 예전에도 차량을 착각해 낭패를 본 적이 있어 엉겁결에 벌떡 일어섰다. 그들의 목적이 나란히 앉는 것에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챘다.
경황 없이 옆자리로 밀려나서야 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호차도, 번호도 맞았다. 그런데, 내가 가진 표에 왜 ‘보낸 승차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을까? 그 표는 내가 지인에게 보냈던 경로석 승차권이었다. 함께 타기로 한 지인이 사정상 탑승을 못하는 바람에 실수로 내 일반석을 취소하고 그 표를 남겨두었던 모양이다. 뜻하지 않게 경로 혜택이 적용된 자리에 내가 앉게 된 셈이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당장 역무원을 불러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모른 척하고 앉아 있을까. 사소한 실수였다고 해도 이건 엄연히 규정을 어긴 일이었다. 굳이 소란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엉킨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 무언가가 쿡쿡 찔러댔다. 이왕 벌어진 일 눈 한번 질끈 감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불법을 저지르고도 큰 소리치는 이들이 흔한 세상 아닌가. 그깟 차액쯤이야. 기차는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양심이여, 잠시 안녕이다.
한숨 자고 나면 도착할 길이 오늘따라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잠은 달아나고 조바심이 달려들었다. 의자 주머니에 꽂힌 잡지를 뽑아 들고 건성으로 넘겼다. 페이지마다 여행지의 풍광이 지나가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맛집 음식이 줄줄이 이어졌다. 눈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간간이 역무원이 좌우를 살피며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익산역에서 동년배로 보이는 당당한 인상의 여자가 올라탔다. 자리를 찾느라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상하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왜 내 번호가 없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더니 결국 큰 소리로 역무원을 불렀다. 하필이면 숨죽이고 있는 바로 내 눈앞에서였다.
지나가던 역무원이 성큼성큼 다시 다가왔다. 들통나기는 시간 문제였다. 숨을 죽이고 있던 나는 결국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불쑥 들었다. 그러나 역무원은 내 좌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녀 손에 들린 표만 받아들었다. 그는 기차를 잘못 탔다며 다음 역에서 내리라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안도감도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살아난 김에 끝까지 버텨볼까, 아니면 양심을 지켜야 할까. 갈등하는 사이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맞은편 좌석의 남자들이 내릴 채비를 하며 흘끔흘끔 나를 훑어보았다. “저 사람 진짜 경로 맞아?”라고 속닥거리는 것만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염색한 내 머리는 여전히 새까맣고 숱도 많은 편이다. 복장도 캐주얼하다. 혹시 남들이 보는 나이테를 정작 나만 모르는 건 아닐까. 나는 괜스레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구부정한 자세를 취했다. 고개를 길게 빼들고 역무원 동향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종착지에 다다르기 오 분 전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찰나, 가슴에 띠를 두른 역무원이 다시 나타났다. 휘장에는 ‘정당한 승차권을 사용합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곧이어 “곧 승차권 점검이 있으니 표를 준비해 주세요.”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막바지에 이런 방식으로 사냥을 하다니, 촘촘하게 짜인 그물코에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없었다.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서면 의심을 받을 테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자니 꼴이 말이 아닐 게 뻔했다. 민망하고 초라한 순간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검거 직전의 범죄자처럼 몸을 떨었다. 그런데 왜 끝까지 외면하고 버텼을까.선을 넘고 싶은 객기였을까, 단순한 물욕이었을까, 아니면 실수를 고백할 용기가 없었던 걸까. 마음 졸임이 극에 달했을 무렵, 기차가 서서히 종착역으로 들어섰다. 속도를 줄이는 바퀴 소리가 마지막 경고처럼 귀에 꽂혔다. 승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차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마음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다.
어쩌면 벌이란 남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기는 모면했지만 차액보다 훨씬 더 무거운 값을 치른 뒤에야 나는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법보다는 양심이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