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아버지! 제가 옷 투정 안 하고 이 바지를 1년 동안 예쁘게 입고 다니면 오히려 거저먹는 장사예요!”
꾸미는 거라곤 인형 머리카락 묶어주는 것 밖에 모르던 초등학생에게도 예쁜 옷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하필이면 백화점 갈 때마다 심장을 콕 찌를 만큼 예쁜 옷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물욕 많은 나는 그 옷을 반드시 사야만 했다. 그날은 하늘생 물방울 무늬의 부츠컷 바지였다.
“이 바지 사 주면 진짜 후회 안 할 거야. 상상해 봐, 나처럼 예쁜 딸이 이렇게 발랄한 바지를 입고 학교를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조그마한 내 몸에 딱 어울릴 것 같은 여자아이 정장 세트를 봤을 때는 때 이른 어린이날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심지어 내년도 생일 선물 등등을 모조리 앞당겼고 다행히 반장선거 날 입고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투쟁 아닌 투쟁을 할 때면 엄마는 얄밉게도 제 몫은 다 챙겨간다고 눈을 흘겼고 아빠는 허허실실 지갑을 열곤 하셨다.
근사한 옷들은 모두 친척동생들에게 넘기고, 해져버린 옷들은 수거함에 다 내버릴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 나는 현실을 살고 있다.
이제는 내가 어떤 옷을 사고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엄마는 모른다.
그보다는 오히려 엄마가 나에게 옷을 사 달라고 한다. 홈쇼핑에 나오는 3종 세트나 막 입을 티셔츠 여러 벌 같은 것들 말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고르고 골라 신규가입을 하고 쿠폰을 쓰고 적립금을 탈탈 털어 아무런 때에 아무렇게나 입을 엄마의 옷을 주문하곤 했다.
나는 어른이 되어가며 비싼 브랜드도 알게 되었고 값싼 옷 여러 벌 보다 좋은 옷을 오래 입는 방법도 배우게 되었는데 반대로 엄마는 홈쇼핑이나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뜨는 인터넷쇼핑 옷밖에 모르게 되었다.
간혹 있는 모임을 위해서는 10년 전, 20년 전에 폼 났던 질 좋은 옷에 몸을 맞추곤 했다.
“엄마는 왜 이렇게 옷을 대충 입어?”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아무런 때에 입을 그저 그런 옷만 주문해 줬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에게 파란색 물방울무늬 바지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파란색 물방울무늬 바지가 있는 백화점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혹시 너무 비싸다고 나가자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도 잠시, 엄마는 SPA 브랜드가 밀집한 2층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5층 여성복 매장을 활보했다.
이런, 내가 엄마를 잘 몰랐다. 우리는 4시간 동안이나 옷을 입어보고 점원에게 매칭을 부탁드리고 또다시 입고 벗고를 반복하였다.
엄마의 파란 물방울무늬 바지는 블라우스와 얇은 재킷이었다.
“엄마, 그런데 이거 입고 어디 갈 거야?”
“어디가 긴. 우리 딸들이랑 놀 때 예쁘게 입고 가고 싶어.”
그렇게 우리는(이라고 쓰고 엄마는 이라고 읽는다) 결재를 했고, 엄마는 말했다.
“이제 우리 딸 옷 보러 갈까? 엄마가 사 줄게. 언니한테는 비밀로 하자”
그랬다! 나는 얄밉지만 제 몫은 다 챙기는 막내딸이었다. 그날부터 엄마와 나의 비밀쇼핑 모임이 결성되었고, 나는 엄마의 충실한 쇼핑 메이트로써 역할과 소임을 다 하고 있다.
엄마와 나의 비밀쇼핑모임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 번째는 “반드시 서로에게 작더라도 뭔가를 사 주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돈을 써 본 적이 없는 엄마와, 엄마를 위해 돈을 써 본 적이 없는 딸이었기에 엄마는 받는 기쁨, 나는 주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고 그 행복은 자연스레 지갑의 마음을 활짝 열게 되었다.
비밀쇼핑모임에서 엄마는 처음으로 나에게 귀걸이를 골라주었다.
귀걸이라니! 중고등학생 때라면 호되게 혼났을 테 였다. 하지만 오히려 과감한 색을 골라주시며 이런 걸 껴야 얼굴이 산다고 하셨다.
나는 이모들 모임에 나갈 격식 있는 재킷을 골라주었다. 재킷 길이가 짧아서 요상하다 하시더니만 직접 입어보고는 눈에 아른아른하셨는지 이모들 모임에도 입고, 회사 교육날에도 입을 거라고 선언하셨다.
단언컨대 우리 비밀 쇼핑 모임에서는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입게 되는 옷은 없다. 두 번째 원칙. “파란 물방울무늬 바지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