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킷 11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엄마의 공간을 허하라

엄마와 ESG - 거실에서 살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by 아침에달리 May 17. 2023

저녁 밤이면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자장가 삼아, 나와 두 언니들은 옹기종기 침대에 누워 서로를 마주 보며 발가락 움직이는 것까지 서로를 따라 하곤 했다.

낮에는 주로 내가 언니들을 쫄랑쫄랑 따라다녔고 우리들의 방을 아지트 삼아 이 침대, 저 침대로 뛰어놀곤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조금 머리가 굵어졌을 무렵에는 시위를 했다.

내 방을 달라고. 나에게도 사생활이 있다고.





처음 점거한 방은 바로 엄마아빠의 침실이었다.

시위를 한답시고 안방에 내 짐들을 몰아넣고, 비상식량을 두둑이 챙겨 문을 잠가버렸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나는 내 방이 필요했다. 이사를 가고 방이 3개가 되었을 때부터 나는 당연히도 내 방을 가질 수 있었다.

내 방에는 밝은 나뭇결이 돋보이는 책상과 볕이 잔뜩 들어오는 큰 창문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도날드덕이 그려진 침대가 있었다. 철마다 책장을 뒤집고, 내 구미에 맞게 이런저런 학용품들로 책상을 꾸몄었다.



내 방은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쌍둥이 자매인 언니들은 늘 한 방을 썼다. 책상 두 개가 이어져 있고 서로의 침대가 마주 보고 있던 그 방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엄마의 방은 기억나질 않는다. 엄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에서 보냈다. 엄마는 TV와 함께 움직였다.  

그동안 나는 엄마에게 방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질 못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엄마는 거실에서 사는 사람이었지만 거실은 공용공간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내 서랍 첫 번째 칸에 넣어두었는데 엄마는 소중한 물건을 어디에 보관했을까?

브런치 글 이미지 4

나는 친구들과의 사진을 책꽂이 가장 밑의 보물상자에 넣어두었는데, 엄마의 추억상자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부끄럽게도 엄마에게 사적인 공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거실 책꽂이, 거실 테이블 위. 모든 공개된 장소가 있을 뿐이었다.



3년 전, 큰언니와 내가 독립을 하고 나서 엄마는 드디어 엄마의 방이 생겼다. 엄마의 방에도 TV가 들어갔다. 그리고 엄마만의 작은 서랍장도 갖추어졌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엄마는 거실에서 TV를 볼 수도 있지만 엄마만의 방에서 볼 수도 있다. 개인적인 물건들은 엄마의 서랍장에 넣어 두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나는 엄마의 방이 마치 공용공간인 것처럼 마구 들어가 버린다. 심심하면 주인 없는 방의 서랍도 한 번씩 열어보곤 한다. 내 방이 뒤져졌으면 눈꺼풀을 까 뒤집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텐데 말이다.


엄마에게 엄마의 공간을 지켜주자. 


거실에 있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엄마에게도 비밀이 생겼으면 좋겠다. 내가 머리가 굵어지자마자 내 공간을 요구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며, 이제는 기필코 엄마의 공간을 사수해 드려야겠다. 

브런치 글 이미지 6

최근에는 엄마에게 읽을 책을 빌려줬는데, 며칠 뒤 다 읽었으니 방에서 챙겨가라고 하셨다.

그 책들은 침대 위, 머리맡 배게 사이에 놓여있었다. 이제 엄마의 책상이 필요한 때인가 보다.


이전 10화 엄마와 비밀쇼핑-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입는 옷은 없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