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
알에서 깨어난 오리는, 태어난 직후 보았던 것을 평생 잊지 못한다. 일곱 살 어린아이였던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부터가 나의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나의 덧붙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렸던 시절. 그때 마주한 '그 여자'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분 내음을 풍기며 나의 근원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내가 마을을 떠나고 도착할 때마다 수돗가에서 홀린 듯 손을 씻는 것은, 그 내밀한 곳에 숨겨진 무언가를 간절히 씻어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자취를 감추신 마당의 파란 대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 여자. 그 여자는 나의 아버지에게 이제껏 본 적 없는가 장 환한 미소를 선물해준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는 어떤 거창한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손과 손을 마주 잡는 것만으로도 꿈결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또한 내가 처음으로 타인을 향한 사랑을 느끼도록 해 준 사람, 바라고 염원하는 것을 만들어준 사람, 그리고 나의 존재를 발견하고 눈물을 흘려준 꽃밭 같은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 여자는 나의 어머니를 홀로 아릿한 외로움 속으로 던져 넣은 사람, 성치 않은 다리의 점촌댁이 눈물을 흘리며 줄넘기를 하게 만든 사람, 스포츠 센터의 중년 부인이 에어로빅 수업 도중 무너져 내리며 통곡을 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이처럼 금단의 사랑을 위해 타인을 눈물짓게 한 대가는 혹독하다. 스스로의 손으로 사랑을 버려야 하는 괴로움 그리고 모질게 사랑을 버린 후에도 가시지 않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그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처연하리만치 어두운 절벽 끝으로 몰아넣고야 마는 이는 바로 어느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다.
결국 소설 속 내가 참담함을 느끼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줄곧 그 여자가 되기를 바라 왔으나, 비극적인 이야기를 선택해 그 길을 씩씩하게 헤쳐나갈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내가 그를 따라서 비행기를 타기로 선택했다면, 나는 흠뻑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고통은 그 행복의 크기를 덮고도 남을 만큼 어마어마했으리라. 불쑥불쑥 떠올라 나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기억들과 애써 감추어 놓았던 모든 두려움, 죄책감, 불안함이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순간들. 나는 결국 그것을 이겨낼 힘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사랑을 이루기보다 다른 이들의 사랑을 지켜주는 쪽을 선택하고야 만다.
치받치도록 당신을 사랑하였으나 결국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던 내가 쏘아 올리는 무목의 화살. 그 화살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와 색이 바래어 버린 목련 잎으로, 눈먼 송아지의 모습으로 남는다. 내 사랑의 지정석, 당신이 있던 자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공석으로 남아 나의 곁을 지켜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