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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밍 Mar 01. 2018

새것과 낡은 사람들의 틈에서

우울증과 공황장애 극복일기



 은은한 불빛을 내뿜는 조그마한 가습기, 잠들 수 없는 밤을 달래주던 푸른 밤의 목소리, 아껴서 정주행한 세 편의 일본 드라마, 알록달록한 색의 화투 패들, 검은색의 잉크와 번지는 종이, 새 안경과 새 바지와 새 투피스와 새 가방과 새 머리와 새 귀찌와 오랜 봉숭아 빛깔의 손톱, 넘실거리는 바다, 미끄러지는 스톤과 선수들, 토끼 모양의 수제 초콜릿, 낡은 사진 속 환한 미소,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어느 지하의 롤러장.


 나를 살게끔 붙들어 준 것들은 모두 처음 만난 무언가였다. 오래도록 나를 지탱해주었던 활자들 위에는 되려 먼지가 쌓였다. 언제까지나 영원한 위안이 되어주리라 믿었던 것들을, 영영 외면하고만 싶어지는 새삼스러운 마음은, 나에게는 이다지도 낯설었다.


 나를 살린 것 중에서 나와 초면이 아니었던 것은 오직 사람들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서 나를 만나러 온, 혹은 만나러 와주겠다고 했던 모든 사람들. 나의 짧은 카톡 하나에 전화기를 두 번씩 울려주는, 내 손을 꼭 잡고 어루만져주는, 고개를 기대어 파고들면 넓은 품을 내어주는, 함께 떠나지 못했던 어느 먼 나라에서부터 간직해온 기념품을 잊지 않고 건네주는, 불안하고 슬프고 아프고 두려운 매 순간들마다 내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는. 은근히 밀어내고 슬쩍 피하려 해봐도 결국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옆자리에 앉게 되고야 마는, 신기한 힘을 가진 나의 고마운 사람들.


 오늘의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새 물건과 낡은 사람들 속에서 조금은 더 머무르고 싶은 기분이야. 땅을 보지 말고, 앞을 보면서 우리 함께 걷자. 앞을 봐야 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가끔은 넘어질 테지만 그래도 우리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 보자. 넘어져도 웃으며 일어나는 그 시끄러운 롤러장의 어린애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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