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쌀쌀했던 여름밤의 기록
처음에는 말이야. 별 거 없었어. 그저 쓰레기를 묵묵히 치워주는 당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더라. 한 달을 봐도. 때로는 일 년을 넘게 봐도. 괜찮은 사람일까 아닐까 고민하게 만드는 남자들은 참 많았는데. 당신은 그냥 첫 순간에 알 것 같았어. 당신은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언뜻 조용해 보이지만. 옆사람에게 은근히 기대어 무언가를 조잘거리는 모습은 꽤 귀여웠던 것 같기도 해. 낯을 가리기는 해도 편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수다쟁이겠구나, 싶었어. 어쩌면 나는 당신의 조잘거림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 그 얘기들을, 조용히 듣고 싶어 졌는지도 몰라.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이상해. 왜 그토록 쌀쌀했던 여름밤에 우리는 뜨거워진 휴대폰을 붙잡고는 새벽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던 걸까. 왜 당신과 나는 뜬금없이 서로의 결혼관을 물어보았을까. 왜 우리는 전화를 끊지 못하고, 우연히 끊긴 전화를 다시 걸고,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웠던 걸까.
실은 있지. 다음날의 나는 조금은 속상했어. 내가 또 술을 먹고서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갈구해버린 걸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또 흘렸던 거고, 나의 실수였고, 이렇게 나는 다시 쉬운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그런데 당신은 말이야. 이런 고민이 나를 잡아먹을 틈도 없이. 의심의 틈도 주지 않고서 나에게 다가왔어.
잘 자요
존대가 아니라 정중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당신의 첫인사가. 나는 어색하면서도 내심 좋았는지 몰라. 한 살이 어린 나에게, 당신이 종종 섞어 쓰는 존댓말은 내가 존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게 해. 내일은 뭐 하시나요, 천천히 오세요, 이제 점심 먹으러 가시나요? 같은 것들. 나는 원래 존댓말을 싫어했는데. 당신 덕에 이 말들이 따스하게 느껴져.
시간 간격을 두고 보내오는 연락도 좋아. 어제보다 쌀쌀하다고, 겉옷을 챙겨야 할 것 같다는 그런 말들을. 잠시 동안의 간격을 두고 보내주는 게 좋아. 그 시간들 동안 나를 생각해 준 것 같아서. 내가 귀엽다고 말해주는 것도 좋아. 물론 당신은 '내'가 아니라, '내가 꾼 꿈'이 그리고 '나의 글씨체'가 귀엽다고 말해줬지만. 결국에는 내가 귀엽다는 말 같아서 기분이 좋아. 잘 잤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너무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물어봐주는 것도 좋아. 나는 당신에게 얼마나 되물었는지, 지난 연락들을 돌아보게 돼.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우리의 사이가 이상하다며 친구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어. 평소에는 그렇게 차분하던 내 친구가 웬일로 목소리를 높이며 말해주더라고.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그냥 그런 때가, 그런 사람이 있는 거라고. 맞아, 그런가 봐. '그냥'이라는 말 앞에서는 모두 스르르 녹아서 사라지는 건가 봐.
진짜 진짜.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게. 자정이 훌쩍 넘어버린 시간에 이런 글을 끄적이도록 만드는 당신이. 싫어하는 술도 내가 좋아하니 같이 마시자는 당신이, 좋아지려고 해. 당신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당신의 넘치는 사랑 속에서라면. 사랑받는 게 무섭고 두려운 나 같은 사람도, 사랑을 받는 일에 조금은 더 익숙해질 수 있을까?
벌써부터 나는 당신 때문에 언젠가 울게 될 것 같다는, 그런 슬픈 생각이 차올라.
그래도, 후회 없이 아낌없이 남김없이. 나도 힘껏 좋아해 볼게.
지금의 나를, 당신을, 우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