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곡예사>를 읽고
아주 슬펐다. 비록 다섯 글자밖에 되지 않는 간단한 감상평이지만. 이 초라한 문장이야말로 책을 내려놓은 순간 나의 머릿속을 그득히 매웠던 복잡한 빛깔의 감정들을 가장 담백하게 드러내어준다.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황순원네 여섯 식구의 헛간 생활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저녁이 드리울 무렵부터는 물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다 큰 어른들까지도 멀쩡한 변소를 놔두고 소나무 뒤편에 만들어놓은 허름한 변소를 써야만 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들 피난민 가족은 헛간에서도 쫓겨나 다른 거처를 찾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헛간을 떠나온 곳에도 그들을 위한 공간은, 그들을 위한 삶은 없었다. 부산으로 흘러내려온 여섯 식구는 결국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 지경에 이른다. 당장 눈앞에 놓인 자신들의 이익과 안위만을 계산하기 바쁜 비정하고 매몰찬 사람들의 사이에서. 정(情)보다는 냉철한 법(法)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황순원의 가족들은 머물러야 할 곳을,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한다. 방을 마련하지 못하는 우리의 가장은 온갖 멸시와 모욕 속에 하루하루를 떠나보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술 사발을 들이켜는 것뿐이다. 난리를 피하여 옮겨 간(避亂) 곳이었지만, 도무지 그 어디에서도 난리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인간은 인간다운 행실을 해야 한다”며, “당신네들도 인간인기요?”라고 묻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말을 내뱉기 위해 입을 떼는 것조차 힘들다. 머무를 곳을 구할 형편도, 그만큼의 돈을 모을 재주도 없는 황순원의 식구들은 마침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야 만 것이다. 누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인간다움’을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들이 정말로 ‘인간답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갑작스레 찾아온 전쟁의 비극은 이처럼 우리들의 삶 속에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전쟁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은 바로 전쟁이 멈추더라도 일상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황순원과 그의 식구들은 슬픈 재주를 부리는 곡예단이 되어버리고야 만다. 동료들에게, 친구들에게, 심지어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까지 구차한 말을 늘어놓는 가장은 곧 이 초라한 곡예단의 단장. 국제시장으로 장사를 나가는 아내와 “플리즈 쎌 투미”를 외치며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그의 아이들은 모두 곡예단의 피에로.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애달픈 운명의 이 피에로들은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면서 위태롭고 초라한 곡예를 펼친다. 우리의 곡예단은 몸 뉘일 곳을 찾지 못해 대구에서 부산으로, 아래로 또 아래로. 자꾸만 내려간다. 아래로, 아래로. 낮은 곳으로, 영영 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인생의 어두운 그늘이라곤 별로 깃들어 보지 않은’ 이들과는 달리, 너무 어두워 볕이라곤 진종일 얼씬도 하지 않고, 공중에서 검은 빗방울들이 내리는 그런 곳으로. 그 절망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황순원의 애처로운 곡예단은 소리를 죽여 가며 울고, 흡사 어둠 속을 날아가는 나비와도 같이 재주를 부릴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곡예단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재주를 가만 떠올리면 ‘가장 진한 어둠도 가장 흐린 빛에 사라진다.’는 말에 살며시 믿음을 걸고 싶어 진다. 아주 작고 흐릿한 빛이라도. 그들의 삶에 깃드는 밝음이 되어주기를. 아주 작은 밝음이 조금씩 퍼져나가 그들의 삶에도 따사로운 볕이 깃들기를 바란다. 겉으로는 환하게 웃고 있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아파하며 울고 있을 오늘날의 모든 곡예사들에게도. 우리 황순원 곡예단의 빛나도록 슬픈 동요가 닿기를. 마음대로들 재주를 피우는 그들의 밤길이 더 이상 쓸쓸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