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
열일곱 살 때부터 스물셋이 된 지금까지, 칠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지만. 그 칠 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다. 이 느낌만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작품 그 자체로 곧 무진이 되어버린, 무진의 공기를 품고 있는 이 소설을 펼쳐들 때면. 덜그럭거리는 차창 너머의 어디에선가부터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6월의 바람이 이는 듯하다.
<무진기행>은 주인공 윤희중이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는 장면에서 출발하여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팻말을 보는 데에서 마무리된다. 무진에서 시작하여 무진으로 끝이 나는 이 작품 속에서. ‘무진’은 서울로부터의 도피처이자 꺼내보고 싶지 않을 만큼 어두웠던 청년시절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오묘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느슨하리만치 한가하고 고요하며, 한편으로는 어딘가 권태롭고 몽롱한 분위기를 풍겨내는 무진. 이러한 무진을 더욱더 ‘무진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무진의 안개이다.
물도 아니고, 공기도 아닌. 물과 공기의 사이라는 그 애매한 위치에서. 땅에 툭- 떨어질 수도 또 영원토록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없이. 여귀의 입김처럼 무진의 읍내를 떠돌아다니는 안개. 이 안개는 무진이라는 공간을 양팔 가득 감싸 안음으로써 그 안의 모든 것들을 어릿어릿하고 흐릿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아득한 안갯속에 갇힌 무진은 끝없는 터널을 헤매듯 답답하고 막막한 윤의 마음을 대변한다. ‘무진’ 그리고 ‘무진의 안개’가 가지는 상징성이 이내 속물 같은 현실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도, 그렇다고 이상에 머무르지도 못하는 윤의 모호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안개에 싸인 무진을 거니는 동안 윤은 ‘하인숙’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윤을 닮았다. 정확히는 윤의 과거를 닮았다.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무진을 떠나 서울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윤은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린다. 윤의 과거를 닮은 그녀는 동시에 그의 현재를 더욱 어지러이 만든다. 그 어느 것 하나 뚜렷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일렁이는 윤의 마음속에 하인숙은 반짝이는 별들처럼 쏟아져 내린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찡그리고 찡그리고 또 찡그리던 윤은 결국 그녀의 조바심을 빼앗고.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윤의 현재에 끼어들었다 한들, 그녀는 윤의 과거와 닮은 여인일 뿐. 이미 현실에 발을 들여놓은 윤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용기도 여력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그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쫓아버릴 수밖에 없고, 다 써 내려간 편지를 찢을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오라는 말도 없이. 당신이 무진을 ‘떠나고 있다’는 냉정한 사실만을 말해주고 있는 팻말을 쳐다보며. 윤은 무진을 떠나 서울로 향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것이 자신의 과거이든, 어렴풋이나마 사랑하던 여인이든, 실제의 무진이든, 윤의 관념 속 무진이든 간에. 어쨌든 그는 무진을 떠나고 있으며, 떠날 수밖에 없는 인물임을 이야기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마치 안개가 낀 듯,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전쟁이 잠시 멈추고. 남겨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속물이 되기에 분주하다. 속물이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길이 보이지 않던 1960년대의 불투명한 젊은 날. 소설은 이처럼 아득한 삶의 장면들을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무진기행>이 나에게 주는 느낌은 늘 그대로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작품의 문장들이 선사하는 느낌은 매번 달라진다. 종이 위에 인쇄된 단어 하나, 구절 하나까지도. 읽을 때마다 낯설 만큼 새롭다.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데도. 지루하기는커녕 작품 속에 깊숙이 빠져들어 그 주위에 한참을 머무르게 된다. ‘무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윤의 이야기를 그린 <무진기행>이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사랑받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순간들을 날카로울 만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