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문장들을 어지러이 늘어놓았지만. 결국에는 '죽고 싶다'는 한 마디의 말로 압축해버릴 수 있는 나의 이야기에. 의사는 자기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자기는 쉰이 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고, 앞으로 내가 살 세상이 얼마나 더 좋아질지도 모르는데. 쉰, 아니 백 살까지도 살아보지 않은 내가 죽고 싶다는 판단을 내리는 건 속단이라고. 일단은 그냥 살아보자고. 살다 보면 분명 더 행복한 날들이 올 거라고.
근데요, 선생님. 선생님 앞에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드렸지만요. 저는 하나도 이해가 안 가요. 쉰 살, 백 살은커녕. 저는 당장 내년의 제 모습도 기대가 안 되는 걸요. 스물넷은 한창 예쁠 나이라지만, 스물넷의 내가 되는 건 여전히 무서워요. 아니, 스물넷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당장 내일. 오늘 밤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뜨면 찾아올 내일 아침이 두려워요. 그래서 오늘이 가는 게 무섭고, 지나간 어제가 아득해지고, 스쳐 지나가버릴 내일을 견딜 수가 없어요.
결국 행복은 별 거 아니라고,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그 흔한 말들을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힘들고 아픈 마음은 별 거더라구요.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울음과 조각조각 부서져내릴 것 같은 마음은 별 일이 맞더라구요. 그런 마음이 너무 커지면요, 행복은 사치 같아요. 고통으로 가득 찬 삶에서 아주 찰나의 행복을 누리는 일조차 저에게는 너무 커다란 사치처럼 느껴져요. 실은, 힘든 일을 힘들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워요. 그래서 자꾸 남들을 속이는 데 익숙해져요. 하나도 힘들지 않은 척. 나는 이제 다 괜찮은 척. 햇살같이 말간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일이 눈물을 쏟아내는 것보다 더 쉬워요, 이제는.
선생님. 선생님이 6개월만 약을 먹으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하셔서. 그 말을 믿었는데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6개월째예요. 아침, 저녁으로 알약을 챙겨 먹는 번거로운 일에도 어느새 익숙해졌어요. 어떤 날에는 오히려 약을 챙겨 먹지 않은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해요. 그런데 선생님. 약을 먹는 일에는 익숙해질 수 있어도. 죽고 싶은 마음에는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그리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새까만 마음은 저를 너무 작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려요.
선생님. 저는 고장 난 인간인가요? 고장 난 기계는 고치고, 고장 난 물건은 버린다고 쳐도. 고장나버린 사람은 어떻게 하나요? 제대로 살 수도,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없는. 엉망진창의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저도 알아요. 선생님도 모르시겠죠. 선생님도 사람인데. 선생님도 겨우 선생님의 삶을 살고 계실 뿐인데. 제 얘기는 그냥 잊어버려 주세요. 저는 이제 사라지고 싶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제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 따위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