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코치 Nov 13. 2021

아니 벌써 귤이 나오다니

“귤이 좀 시어야 맛있지.”


예전에 엄마랑 귤 까먹으며 내가 한 말이다. 엄마는 드시던 귤이 시다며 투덜거리셨다. 평소 생레몬을 먹어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 나는 너무 달기만 한 귤보다 신 귤을 더 좋아했다.

오늘 혼자서 까먹는 귤마다 코가 시큰할 정도로 신맛이 났다. 어째서인지 오늘은 신맛이 나는 귤이 영 입에 맞지 않아, 엄마가 귤이 시다며 투덜거리던 상황이 떠올랐다.


나는 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겨울이 오면 박스 채 사놓고 먹긴 했는데, 그 박스 속 귤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본 기억이 드물다. 대부분 몇 개 정도 까먹고 썩혀 버리곤 했었다.

그렇게 버려지는 귤이 아까웠는지 어느 때부터는 귤을 사 먹지 않았다. 가끔씩 귤이 생겨서 먹어도 그렇게 맛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름에도 귤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귤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귤을 다시 챙겨 먹게 된 건 약 2년 전 제주살이를 하게 되면 서다. 서울에서 겪은 이런저런 일로 마음을 달래려고 떠난 제주에서 약 두 달 정도 생활을 했었다. 첫 한 달 지내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귤을 항상 큰 바구니에 비치해두었다. ‘그래도 제주에서 살고 있는데 귤이랑 좀 친해져 볼까?’ 싶어 주워 먹던 귤은 생각보다 좋은 간식이 되었다. 그 뒤로는 식당, 카페, 숙소에서 귤을 발견하면 한 두 개씩은 까먹곤 한 것 같다. 지금처럼 귤을 수확하는 철이 오면 제주에서 식당, 카페, 숙소에 귤을 비치해둔 걸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숙소에서 지내면서 먹던 귤은 조생귤인데, 조생귤과 밀감의 차이를 알게 된 것도 이곳에서 잘 지내던 동생에게 들은 것이다. 그 동생과는 하루 일과를 마치며 그 동생이 내려주는 차를 함께 마시곤 했다. 나는 큰 바구니에 거의 매일을 귤을 몇 개 집어와 동생에게 권했는데 어느 날 그 동생이 “저는 조생귤보다 밀감이 좋아요. 부드럽고.”라는 말을 해서 조생귤과 밀감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작년 깊은 겨울, 마트에서 밀감을 사서 먹어보니 확실히 조생귤보다는 부드러운 편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조생귤과 밀감의 큰 차이는 잘 안 느껴졌다.




제주에서 시장을 가면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황금향 등 비싼 품종 귤을 파는 상점이 많다. 나는 서울에서 한라봉이나 천혜향 같은 귤을 사람들이 귀하다며 맛있게 먹을 때 몇 번 같이 먹어봤지만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귤이랑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달까.


2년 전 이틀 정도 머물던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모슬포항 근처에 있는 시장에 갔다. 그곳에서 서울에 귤을 보낸다던 여행객이 품종 귤을 여러 박스 구입했다. 그 상점에서 서비스로 품종 귤 몇 개를 봉투에 담아줬는데, 같이 시장에 갔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나에게 ‘황금향’이라며 귤 하나를 건넸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황금향은 껍질이 얇고 까기 힘들다고 알려주었다.

껍질이 얇은 황금향 / 이미지 출처 - https://www.iboxjeju.com/products/1


나는 황금향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가 새로 한 달 지낼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 책상 위에 올려놨다. 2주 정도 지난 후 문득 ‘먹을 거 없나’ 싶어 방을 둘러보니 꽤 오랜 시간 묵혀둔 황금향이 보여서 침대에 엎드려 까먹었다. 이야기 들은 대로 껍질이 얇아 까기 힘들었다. 황금향은 2주가 지났는데도 상한 기색이 전혀 없고 정말 달고 맛있었다. 하나만 있는 게 아쉬울 정도였달까. 시장에서 품종 귤은 박스로 보통 2만 원 이상인데 일반 귤보다는 크기가 2배 정도이고 박스에 10개 정도 들어있어 일반 귤에 비해서는 가격이 비싸다. 그 가격이면 나는 일반 귤을 먹겠다고 늘 생각했는데, 2주 묵힌 황금향을 먹고는 왜 사람들이 돈 주고 사 먹는지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어 서울 집에 택배 주문할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황금향 철이 지나 파는 곳이 없었다. 2주 전에 팔던 게 거의 끝물이었나 보다.

 

그 뒤로 그해 여름에 다시 제주에 갔다가 황금향을 팔아서 서울로 택배 주문을 했는데 2주 묵힌 그때의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2주 정도를 묵혀봐도 그때의 맛이 나지 않았다. 최근엔 제주로 여행을 다녀온 직원이 사 온 황금향을 하나 까먹었는데 그때도 제주에서 먹었던 그 맛이 나지 않아 조금 실망했다. 생각을 돌아보니 일반 귤이던 품종 귤이던 귤은 하나하나 귤마다 맛이 다르다. 같은 나무에서 난 귤들도 어떤 귤은 맛이 달고, 어떤 귤은 시고, 어떤 귤은 맹맹하다. 또한 사람의 입맛도 모두 다른데, 귤도 다르고 사람의 입맛도 다른 상황에서 그때 느꼈던 황금향의 맛을 찾는 것도, 그때의 맛을 타인과 공유하는 일도 아주 어려운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살이를 마치고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는 귤을 자연스레 사 먹게 되었다. 귤만큼 맛있고 먹기 편한 과일도 없는데 그동안은 왜 그렇게 내가 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제주에선 팔리는 귤보다 버려지는 멀쩡한 귤이 많다고 한다. 내가 사 먹으면 버려지는 귤이 그만큼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하우스 재배로 사계절 먹을 수 있지만 역시 귤은 추울 때 먹어야 제맛이다. 과일가게 큰 바구니에 담겨있는 귤들을 보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포장되어 있지 않고 바구니에 담겨 있는 귤이 반가웠다. 자연스럽게 봉지에 담아 귤을 사들고 왔다.


어느덧, 한 해가 가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ZrIH607Pk8

요조 - 귤 / 매년 이맘때면 흥얼거리게 되는 곡 (원곡 - 재주소년)
오랜만에 학교에서 후식으로 나온 귤
아니 벌써 귤이 나오다니
얼굴이 스치는 바람이 좀 차졌다
생각은 했지만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 줄이야

<요조 - 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왜 크랙실버를 좋아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