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안테나는 "먹고 살만 합니다"라는 상징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 혁명을 계획했다는 신당동 가옥은 이제 문화재로 지정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그 집 뒤로 수도국 산이라는 동산이 있었는데 배수지였다. 그곳은 철조망을 쳐 놓았으나, 특별히 놀이터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아이들은 개구멍으로 들어가 놀곤 하였다. 배수지 안에는 주인 없는(?) 무덤이 몇 개 있었는데 미끄럼틀 대신 타고 놀아서 무덤 위가 반들반들할 정도였다. 배수지 옆은 무허가 흙벽돌집들이 많은 달동네였는데, 언덕길에는 연탄가게, 구멍가게, 복덕방, 이발소등이 있었다. 골목길은 흙길이라 비가 오면 여기저기 파였고 그곳에 연탄재를 부셔 넣어 아예 길이 허연색이었다.
신당동(新堂洞)은 원래 조선시대에 신당(神堂)이라 썼던 것이 갑오개혁 때 바뀌었다. 신(神)이라는 글씨를 보고 짐작할 수 있듯이 신당은 무당촌이었다.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온 망자들의 넋을 위해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판을 벌였다. 그렇게 광희문 바깥으로 신당들이 생겨났다. 한 편으로는 유교 국가의 미신 타파 정책이 신당동을 만드는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도성 안에서는 살 수 없던 무당들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됐고 그렇게 생겨난 곳 중 하나가 신당동이라고 한다.
근대기 서울에서는 빈민들이 신당동에 대거 유입되어 판자촌 등의 밀집 주거지를 만들기도 했다. 신당동은 그렇게 도시 중앙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던 외부인들을 품으며 도시의 성장판 같은 역할을 했다. 굿판은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고, 판자촌은 도시에 노동력을 제공해 줬다.
신당동은 먼지와 아스팔트의 체취가 바람에 묻어나는 곳이다. 리어카 바퀴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도로를 땜질한 두꺼운 금속판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말들이 자연스럽다. 어떤 날은 하얗게 빛나던 하늘이 파란색과 회색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자랄 때부터 신당동은 어느 것 하나 새 것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만지고, 밟았는지 추측할 수 없을 만큼 때가 묻어 있는 곳이 있었다. 그만큼 오래된 곳이다. 닳고 닳은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시간은 사람의 흔적이다.
요새 ‘신당동’하면 떡볶이 골목이다. 옛 동화극장 옆은 원래 자그마한 개천이 흘렀는데, 1973년에 복개 공사가 끝나며 ‘떡볶이촌’이 들어선다. 이곳이 명성을 타게 된 것은 MBC 라디오 ‘임국희의 여성 살롱’에 떡볶이 골목이 소개되면서부터인데, DJ가 신청곡을 틀어주고, 떡볶이에 햄, 소시지, 사리, 어묵, 만두, 라면, 계란 등을 넣은 퓨전 스타일의 메뉴가 일품이었다. 그 이후 1980년대 중반에 <그룹 DJ 덕>이 부른 신당동 떡볶이를 주제로 한 노래, ‘하리케인 박’이 히트하며 이 골목은 서울의 명소로 자리하게 된다.
서울 대부분이 그렇듯, 신당동도 지방이나 이북에서 피난 온 분들이 많았다. 다 같이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고향은 달라도 이웃 간의 끈끈한 정과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더불어 나누던 아름다움이 있었다.
해질 무렵이 되면 새끼줄에 꿴 연탄 한 장, 신문지에 싼 꽁치 한 마리, 봉지 쌀 한 줌을 들고 집으로 향하던 모습의 신당동 사람들이 그립다. “토론토의 신당동 사람들, 우리 한번 모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