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나의 다음
예전에 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여행 횟수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행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의욕이 없었다.
오랜만에 여행을 했다.
내가 계획한 여행이 아니었고,
생각지도 못한 여행이었지만,
어쩌다 기회가 생겨 가게 되었다.
목적지는 제주.
기간은 9박 10일.
제주는 수학여행 이후로 처음이었고
10일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미건조했다.
사실 가기 전부터 단 한 번도 설렌 적이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들뜨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았다.
도착하고 나서
연락하는 사람들이
신나는지, 재밌는지 물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냥 그렇다고
들뜨지도 신나지도 않는다고 대답했다.
바다를 보면서도,
아, 바다구나.
돌고래를 보면서도,
아, 돌고래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음, 괜찮네.
그저 난 목각인형 같았다.
맑은 제주, 흐린 제주, 바람 부는 제주,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예쁜 제주는
시시각각 날씨가 변했고,
나도 변했다.
내가 제주에 스며든 것일까?
서서히 달라졌다.
운동화만 챙겨간 나는
물속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모래도 직접 밟지 못한 게 아쉬워서
다음에는 신발을 챙겨가서 물에 들어가야지.
모래도 밟아야지.
맛있는 음료를 마시면서,
다음에 제주 오면 또 마셔야지.
다음에 다른 메뉴도 마셔봐야지.
예쁜 돌담길을 차로 지나다니면서
다음에는 걸어서 이곳저곳 돌아다녀봐야지.
다음에는 느긋하게 제주의 마을을 구경해야지.
바다에서 파도와 함께 서핑하는 분들을 보면서,
와, 서핑 엄청 재밌겠다!
다음에 따뜻해지면 다시 와서 서핑 배워야지.
무리 지어 다니는 제주남방큰돌고래를 보면서
바다에서 멋지게 살아가는 돌고래들이
아름답고, 멋졌다.
바다에서 돌고래를 보는 것이
기대되고 신나고 재밌었다.
다음에도 꼭 돌고래를 보러 와야지.
다음에는 하루종일 봐야지.
내가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하고 싶은 것이 생겼고,
다음에 보고 싶은 것이 생겼고,
다음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멍하니 푸른 바다를 보고,
멍하니 모래 위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예전에 나는 혼자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안 한 지 오래됐다는 것도 깨달았다.
오래도록 하고 싶은 것도,
사고 싶던 것도 없던 나였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어느 날, 친구가 다시 물었다.
여행은 재미있냐고, 어떠냐고.
그때, 친구한테 말했다.
약간 활력이 생긴 거 같고,
뭔가를 하고 싶어 졌다고.
친구와 함께든 혼자서든
여행을 하고 싶어 졌다고.
이제 조금은 내가 사람 같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사람 같아졌다는 말에 메시지가 웃음으로 가득했지만,
거기 가서 좀 사람다워진 것 같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그 말은 따뜻한 제주의 햇살처럼
나에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제주여행에서의 나는,
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즐겁기도, 힘들었기도 했던 나의 과거를,
무기력했던 현재도 생각했지만,
다음을 떠올리고, 미래를 꿈꿨다.
여전히 나는 나를 찾는 중이다.
여행의 목적이 나를 찾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나를 찾는 찰나의 순간들을
떠올리고,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