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터에서 만난 인연, 언젠가는 다시 만날까?
미국 살이, 여기에서도 인연이......
인연과 악연.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그만큼 관계는 중요하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그 곳이 꽃밭이되고, 악연을 만나면 꽃밭이 순식간에 지뢰밭이 되기도 한다. 이제 거의 일년을 채워가는 나의 미국 연방 공무원 생활. 이제 공무원에 대한 환상은 조금 벗었고, 어떻게 하면 좀더 내 자리보전을 위협없이 잘 할 수 있을지 현실적 고민이 들어온다. How to cover my ass 이 것이 내 책의 제목이다. 달순은 어떻게 미국 일터에서 남들에게 밀리지 않고, 위험에 처했을땐 어떻게 대처했나.... 전쟁터 같은 일터에서 스승같았던 L과의 긴 이별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소중했던 인연 엘. 그래서 나는 사실 쪽팔리게도 펑펑 울었다. 그만큼 고마웠다.
공평정대함의 대명사L
사실 엘은 특이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었다. 나는 엘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게 꿰뚫어 보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은 그가 영혼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와, 정말? 정말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색깔은 다른 거구나.....
2주 전에는 사람들이 슬슬 일찍 빠져나갔다. 그 날 작은 변화가 있었고, 이를 뒤늦게 알아챈 나는 남들처럼 약삭빠르게 행동하지 못했다. 나 혼자 유일한 여성으로 원래 일하던 것처럼 늦게까지 있었다. 그걸 엘은 기억하고 있었다. 1주일이 흘렀다. 나를 보자마자 그가 말했다.
"너 오늘 일찍 갈거야?"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이 똥그래졌다.
"흠, 잠깐만요. 한시간 뒤에 대답해도 되요? 생각할 시간을 주소!"
"그럼 너는 리스트에서 뒤로 밀려갈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하오리다!"했다. 일에서는 내가 시간을 쓸 수 있는 일종의 연차 같은게 있는데, 막상 이 시간을 맘대로 쓰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윗 사람 눈치도 봐야 하고, 상황 파악도 해야 한다. '지금 이걸 쓴다고 하면 받아줄까 안 받아줄까.......' 그래서 이런 제안이 들어왔을 때, 기회다! 라고 해서 얼른 낚시질하듯 탁, 하고 낚아야 한다. 안 그러면 시간을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할 최악의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대답했다. "네! 쓰겠습니닷!" 그리하여 원래보다 두 시간 일찍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 뭔가가 느낌이 이상했다. 평소에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D가 갑자기 쉬는 시간이라며 나타났다. L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뭐지? 뭘까? 이 이상한 기운은?......! 그때 감이 왔다. 아, L이 늘 은퇴한다
은퇴한다 말하더니 어쩌면 오늘이 그를 보는 마지막 날일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 그 날 바로 다음 날부터 그의 긴 휴가가 시작된다. 우리 모두는 그 사실만 알고 있다. L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괴팍한 사람이라 십수년간 일한 이 일터에서 자신이 은퇴하는 날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 왜 이순신 장군이 생각나는걸까.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L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같이 오래 일한 사람들과 공식적으로 헤어지는 인사를 하는 게 그렇게 싫나? 잘있으오, 잘 가시오와 같은 드라마를 연출하기 싫은 마음이었을까? 그냥 어느날 갑자기 일에 나오지 않겠다고 연락하고 안나온다. 그것이 그의 오래된 은퇴 계획이라는데...... 어찌보면 연기처럼 훅, 사라지고 싶은 그의 모습이 아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참 뒤끝없이 후루룩 사라지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의 질문 하나. 일은 뭘까. 일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은 무엇일까?
삼십분 정도가 지나, 다른 동료 P가 집으로 갈 때가 되었다. 콧수염을 많이 곱게 기른 그는 늘 출퇴근을 오토바이로 하기에 특수 의상을 걸치고 퇴근을 한다. 오토바이 탈 때 입는 갑옷같은 느낌의 두꺼운 녹색 계열의 옷. 그는 오랫동안 경찰일을 해 와서 온 몸에 미국인 경찰의 태도가 베어있다. 큰 걸음걸이. 짐작컨대 P는 60대이며, L은 70대 초반이지 싶다.
P는 퇴근 준비를 마치고 성큼 L에게 다가갔다. 얼굴에 얇은 미소를 지으며
"어쩌면 내가 잘못짚은 것일 수 있겠지만 (당신이 긴 휴가를 가 있는 동안 일에 전화해서 나 이제 안나갑니다. 말하면 은퇴인거지? 그게 당신의 계획인거지?) 만약 당신이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인사를 그래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사실 그 뒤에 P가 L에게 뭐라고 몇마디 더 했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우리 모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중년 남자들의 뜨거운 악수였다. 어찌나 단단하게 서로의 손을 잡고 있던지 보고있는 내 눈에서도 눈물이 찔끔 났다. 저것이 이들의 마지막 인사일까. P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성큼성큼 큰 발걸음을 내딛으려 밖으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L은 그날따라 휘파람을 많이 불어댔다. 자신의 몸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일터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솟구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고 한 행동이 아닐까. 일에서의 마지막 날을 마치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어느 다른 또 하루인것처럼 대하고 싶은 그의 마음. 그런데 나는 느닷없는 D의 방문이라던가, P의 뜨거워진 눈시울을 보면서 나 역시도 L에게 뭔가 마지막 아닌 마지막 말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뭔가 멋진 말, 그의 마음속에 울림으로 남고 싶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면 그가 평소에 내게 보여줬던 준-상사로서의 공평함, 어느 누구에게라도 특혜를 베풀고 싶어하지 않는 평이한 마음, 그리고 일과 관련해서 무엇이든 물어보면 늘 아는대로 대답을 해 주었던 감사함에 대해 보답하고 싶었다. 그것이 사실 한 장의 카드도 아니고, 한 조각의 케잌도 아닌데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할 걸. 가방 속에 카드 한 개라도 담아놓을걸...... 그런데 시간이 그런 내 마음을 기다려 줄 리 없다.
'오늘 일찍 간다고 했으니, 나 역시도 삼십분 뒤면 퇴근이다.....'
옷을 다 챙겨입고 가방을 싸고 퇴근 준비를 마쳤다.
어쩔때는 말줄임표와 눈물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L, 내일부터 휴가지요? 휴가에서 돌아와 다시 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것 같아서요. (우리는 당신의 계획을 알고 있어요!)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어요. 당신은 친절함과 따듯한 마음......"
사실 문장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았는데, 속에서 울음이 화르르 터져버렸다. 그렇다고 일터라 아이처럼 흐아앙! 목놓아 울정도로 대담하지 않았다. 다만 문장을 끝마치지 못했고, 빨갛게 익어버린 내 얼굴과 눈물이 그렁한 내 얼굴을 보고, L은 고개를 확 돌려버렸다. 그랬다. 아마 그는 이런 순간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고개를 돌려버린 행위는 이해가 갔다. 아주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악수를 청했다. P가 한것처럼 말이다.
"미국에서는 악수를 할 때 손에 힘을 꽉 주고 해야 해. 그게 그 사람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거야."
언젠가 오클라호마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PM이 해 준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늘 최대한 악수할 때 손에 힘을 있는대로 쥔다.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말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L의 손은 부드럽고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정말로 할아버지같은 손이었다. 아, 이렇게 당신의 마음도 여리고 약하고 순한데......
일에서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강하고 사나운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 않으면 잡아 먹힐것 같으니 말이다. L의 모습은 대부분이 이렇듯 '짤없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만난 그의 악수에서 받은 느낌은 정말로 "내가 본 당신의 모습이 맞았다." 였다.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는 마음. 그 모습이 진정한 보스, 상사, 수퍼바이저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일에서 어떤 상사는 늘 으르렁댄다.
'너가 조금이라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기록으로 남길거야. 그리고 그걸 너를 매니징하는 수단으로 써 먹어야지. 그러니 잘 해.'
그런데 이것은 협박이며, 사람을 길들이는 최악의 방법이다. 너와 나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든다. L은 그 반대였다. 물론 그가 몇번 나를 째려보거나 내게 야단치는 말을 한 적도 있지만 그것이 악의에서 나오지 않았다.
표현하지 못한 편지
엘, 지난 약 십개월간 당신을 일터에서 만나서 참으로 고맙고 좋았습니다. 어떨 때 나는 사실 내 상사의 올바르지 못한 처사와 행동에 화가 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중간에 엘 당신이 있었기에 그런 순간들을 잘 참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맙습니다. 사실 나는 이 코카시안 백인 중심의 일터에서 외로운 도톨이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습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백인이거나, 나를 뺀 모두가 미국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 나와 그들 사이에 문화단절을 느낄 때도 종종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그저 사실 일뿐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내가 미국에서 일하기를 선택한 것이니 말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어찌어찌하여 나의 그런 외로운 마음을 잘도 토닥거려주었습니다. 그것이 내 성실함을 당신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것이 한 때 한국에서 일을 했던 당신의 국제적 감각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진심을 다해 꼭 하고 싶었습니다. 이 모든 말들을 들려주고 싶었는데, 마지막 순간을 아이처럼 울어버리고 말았네요.
사실 내 남편은 "엘이 죽은게 아니다. 다만 은퇴를 했을 뿐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 지긋지긋한 일터를 떠나 자유로이 훨훨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스트레스 없는 생활에 돌입하십시오. 또 누가 압니까. 언젠가 다시 어떤 얼굴로 만날 수 있을지! 늘 건강하세요.
추신: 엘, 당신과 함께 사진 한 장을 꼭 찍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한 장 찍어요!
2019년 9월 10일 달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