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과 칼국수
“만약 죽은 사람을 불러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면 누구를 초대하고 싶나요?”
저는 제 할머니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존함은 윤 자 정 자 수 자 입니다. 저는 할머니가 한번도 안 가 보셨을 법한 고급 한식 식당에 가서 함께 한 끼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식사는 맛이기도 하지만 경험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한 사람 더 이 식사 자리에 부르고 싶습니다. 제 큰고모이십니다. 아마도 큰고모님께서 할머님께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열 코스짜리 식사를 천천히 하면서 서로에게 약이 될 수 있는 말들이 냇물처럼 서로에게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할머니와 나 – 시작은 욕, 끝은 안타까움
“에이, 그 놈의 씨부럴 딸년은 낳아서 뭘하는겨!”
1982년 내가 태어나던 날, 할머니는 들에서 일을 하다 내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의 일곱 고모들과 엄마는 이 말을 내게 고자질하듯이 하셨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그러한 감정이 들었던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할머니는 그 시대의 산물이셨고, 그래서 오직 아들과 손자만이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으셨으니 그랬겠거니 한다. 1920 년생인 할머니 본인도 딸이 많은 집에서 태어나셨고, 남편의 남동생 식구는 아들이 많아, 늘 보이지 않는 경쟁과 열등감과 시집살이에 시달리셨으리라.
만약 내가 방학 때 할머니 댁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할머니와 나 사이는 무덤덤하고 별일 없는 그저 그런 관계에 그쳤을 것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방학이 되면 바쁜 부모님과 두 오빠가 있는 도시를 떠나 충북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으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여름을 보냈다. 매미가 울고 환한 달빛과 옥수수밭이 있던 그 시간과 공간이 할머니와 나 사이를 돈독하게 해 주었다. 사실 그때 한 것이라곤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 뿐이었다. 시골에 특별히 초등학생인 내가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들은 가로등이 없는 캄캄한 시골 밤길을 할머니와 걷다가, 할머니가 볼일이 급하셔서 내가 망을 봤던 기억. 그리고 여름의 한 낮에 할머니를 따라 깻잎을 땄던 기억. 그 향긋한 진초록빛 깻잎이 이 미국땅에서는 그토록 귀한 채소가 될 줄이야. 내가 미국에 와서 살거라고는 더더욱 몰랐다. 세상일은 이렇게 알 수 없듯이, 오직 아들, 손자를 입에 달고 사셨던 할머니에게 나는 어느새 그녀의 베프(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당시 정정한 60대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표 음식은 도토리 묵과 칼국수다. 둘 다 도시에 사는 어린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음식을 하실 때면 육체의 피곤함을 누르고 정성껏 준비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어린 내 눈에도 보였다. 커다란 달력을 쭉 찢어, 시골집 마루 바닥에 뒤집어 편 다음, 긴 나무판을 놓고 그 위에서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또 치대셨다. 평생 농사를 짓던 그녀의 뭉툭하고 단단한 거친 손에서 찰진 국수반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몽두깨로 럭비공만한 반죽을 밀고 펼치고, 중간 중간 흰 가루를 뿌려서 또 밀고 펼치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반죽이 달처럼 커지고 나중에는 둥근 보자기가 됐다. 드디어 얇게 펴진 밀가루반죽 보자기에 가루를 솔솔 뿌려가며 접고 접어서 슥슥슥 자르면 칼국수 면발이 나왔다. 할머니 칼솜씨는 장인의 경지라고나 할까? 일정한 속도로 썰어내는 면발 굵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똑 같았다. 어느새 할머니의 두 손은 물론 얼굴에도 밀가루가 묻었다. 할머니는 살림과 농사일에 치여 사셨지만 항상 호탕하고 씩씩하게 웃으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웃는 모습을 닮았다. 할머니가 그렇게 땀을 흘리며 칼국수를 만들고 웃는 이유는 집안의 장손으로 왕대접을 받았던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구수하고 담백한 할머니표 칼국수를 아빠는 후루룩 쩝쩝 큰소리를 내면서 잘 드셨다.
도토리묵도 마찬가지다. 어린 내게는 입안에서 물컹하기만 하고 씁쓸하고 간장 맛 밖에 나지 않던 도토리묵을 할머니는 또 열심히 만드셨다. 그 역시 아빠가 허겁지겁 후루루룩 소리를 내면서 잘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늦가을이 되면 다람쥐처럼 주변 산을 오르내리며 도토리를 주워다. 그것을 절구에 빻아 체로 치고 그렇게 반복하기를 여러 번. 이렇게 직접 도토리 가루를 만드셨다. 또 도토리묵을 만들려면 지난하고도 긴 노동 시간이 요구된다. 불 위에서 도토리 가루가 묵이 되려면 수도 없이 젓고 또 저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힘이 들어 팔이 아프다. 끓으면서 튀어 오르는 방울에 손을 데이기도 한다. 묵을 쑬 때는 가루와 물 양의 비율, 끓일 때 불의 온도, 끓이는 시간 등에 따라 묵 상태가 달라진다. 그래도 할머니는 그 일이 보람이고 기쁨이고 사랑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또 대학원에 가는 동안 나는 내 젊음을 사느라 칠십 대가 되고, 팔십이 되어갔던 할머니의 노후를 아주 띄엄 띄엄 봤다. 그리고 2011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뵌 날은 임종 며칠 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고모네 안방에 누워서 생활하셨던 할머니. 그녀의 몸은 초등학생처럼 작아져 있었고, 남자 아이처럼 툭툭 자른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나를 알아 봐주셨던 할머니. 다만 식사를 잘 못하셨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크고 씩씩한 목소리로 “할머니! 잘 계시네요! 아이쿠. 잘 잡숴야지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의 식사를 위해 그녀의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며칠 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와 고모 – 애증의 도토리묵
할머니표 도토리묵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가 작년 할머니 제사 때 다시 그 맛을 보았다. 할머니에게는 두 명의 왕들이 있었다면, 일곱 명의 딸들은 왕의 시중을 드는 종이었다. 할머니의 이같은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대우가 큰 고모에게는 참으로 큰 상처가 되었으리라. 아버지의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큰 고모댁이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들린 그 곳에서 큰고모가 나를 붙잡고 손으로 가슴을 치며 이런 말을 하셨다.
“에휴. 나는 아직도 니 할머니한테 맺힌게 많어. 그래서 오죽허믄 내가 죽은 니 할머니 무덤에 가서 혼자 내 한풀이를 한단말이여.”
고모는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딸년이 공부해서 어디다 쓸 것이냐는 게 할머니의 교육관이었다. 그래서 대학 졸업장을 딴 아버지와 달리, 고모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하는게 마지막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가 잘 만드셨던 도토리묵은 큰고모의 손에서 다시 만들어졌다. 미국 이민생활을 하는 내게 시골 한식은 집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라면 무엇이든지 맛나게 느껴졌다. 그런데 할머니 제사라서 모두 모인 자리. 제사상에 오른 큰고모표 도토리묵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어린시절에는 그 맛을 몰라서 맛 자체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탱탱한 도토리 묵. 흐물흐물하지도 않고, 입안에서 통통 튀는 식감.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파와 간장이 들어간 양념맛. 나는 어른들 앞에서 염치를 불구하고 숟가락으로 도토리묵을 잘도 먹었다.
할머니 제삿상 앞에서 나의 고모들과 아빠, 엄마, 오빠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유일하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 하지만 그 제삿상을 만들기 위해 다시 고모들의 노동이 요구된다. 수십년이 지나도 고모부들은 안방에서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시거나 내가 심부름으로 가져다 드린 안주상에 젓가락질을 하셨다. 하아. 마치 나 혼자 어느 행성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십수 년 전과 그때의 풍경은 여전했던 것이다. 할머니 제사상에 오른 음식에는 고모들의 정성이 눈에 보였다. 하늘이 맺어 준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그리고 그 한가운데 놓여진 음식. 만약 내게 무한한 마술이 있다면, 할머니를 한번 모시고 싶다. 그래서 내 앞가림 가리느라 못 찾아 뵈었던 그녀에게 ‘할머니의 70대, 80대’는 어떠했는지 아주 늦은 안부를 묻고 싶다. 식사 속에서 음식이 오고 가고, 치유가 되는 대화가 오고 가면 큰고모의 마음도 도토리묵처럼 말랑말랑해지지 않을까.
*여기에 실린 글은 저자(조소현)에 속한 것이니 함부로 도용하는 것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