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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Dec 31. 2020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최은영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

예전에 읽었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던 어떤 포근함, 따듯한 시선 같은게 느껴져서 참 뭔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임에도 위로 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첫 두 세 작품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인물의 성격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 소설 속 화자가 직접 성격이 어떻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인물 '갑'이 보기에 '을'은 이런 성격인것 같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것도 참 배울만한 부분이다. 음식을 언급하는 부분 역시 어떤 위로, 따듯함, 그런 것이 느껴졌다. 참고로 요즘 한국 문학을 읽고 있는데, 김혜진 작가의 소설에도 음식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머릿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는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떤 불편한 감정, 어색한 분위기 같은 것을 인물들이 음식을 먹는 것으로 표현한다. (돈가스를 먹는 장면) 여러 작가를 읽으니 이렇게 뭔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다. 나의 2020 겨울은 캘리포니아에서 6개월째 준 자가격리스러운 삶이지만, 이 책들로 일상이 찐일상이 되고 있다. 


'그 여름'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참 인물 간의 마음, 성장, 이런 것이 잘 느껴졌다. 특히나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도 되고, 아니 어쩜 저렇게 사악한 인간이 있단 말인가~! 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작가가 모든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있게 그려냈기 때문이 아닐까? 수이가 좀 이상적으로 나오긴 했으나 (아니, 세상에 저렇게 애인의 배신을 쿨-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미워만 할 수 없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 

'창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경의 시선은 자꾸 창가로 향했다.' 14/702 리디북스 

인물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 참 멋있다. 


"그럼 나랑 점심 먹을래?"

 수이는 이경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 말을 했다. 그 자신 없는 표정과, 간신히 힘을 끌어올려 짧은 문장을 말로 풀어내는 모습을 이경은 가만히 바라봤고, 15/702 리디북스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 참 작가가 두 인물의 속내를 매우 깊이, 그리고 인간적인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무척 아름답다고 느껴졌던 문장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예민하고 그래서 민첩하게 알아내는 감정들 

"이경을 쳐다보는 여자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속을 아프게 찌르는 웃음이었다." 24/702 리디북스 

" '짓궂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줄곧 생각해 왔다고 수이는 이경에게 말했다. "비열한 말이라고 생각해. 용인해주는거야. 그런 말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거야." 

참 이 문장을 인용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썼던 말, 짓궂다 라는 표현. 생각해 보면 주로 아이들에게 하는 말인데, 여자 아이에게 짓궃다 라는 말보다 남자 아이들의 험한 장난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이 소설에 나온 수이 라는 인물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줄거리는 수이와 이경이 연애를 하다가, 이경이 바람이 나서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내용인데, 수경이 어찌 그리 이경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너무도 뒤끝없이 관계를 종료하고 굿바이를 했다. 수이 캐릭터는 참 쿨하면서도 슬펐다. 


돈에 대한 생각을 문장으로 정말 참 잘 표현해 냈다. 

'보증금 오백만원은 이경과 수이의 관계를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주었다.' 66 


'601, 602'

이웃집에 사는 효진이와 화자인 나의 이야기. 그리고 이 두 인물의 가족과 사회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 곳곳에서 들어나는 작가의 뭔가를 '포착해 내는 시선'이 귀엽고도 참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바지의 반들반들함을 묘사하기도 했지만, 그 뒤에 있는 당시 한국인 남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가 보인다. 

"남자들의 정장 바지는 엉덩이 부분이 반들반들했다. 정장은 검은색으로 같았지만 양말은 다 달라서 어떤 남자는 뒤꿈치 부분이 닳아 살이 비치는 검은 양말을, 어떤 남자는 회색 발가락 양말을 신고 있었다."130/702 


화자인 주영이는 효진이가 오빠에게서 폭력을 당하는데, 부모님은 이를 묵인한다. 그리고 주영이가 이를 말리려고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말하지만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 남의 집안일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님을 확인받을 뿐이다. 작가는 모든 인물과 사물에게 위로의 말을 남발하지 않는다. 반대로 더욱 예리한 시선으로 가정 내의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폭력, 사회적으로도 어찌보면 용인되는 남자 아이들의 짖꿎은 행동과 그것을 짖궃다라고 표현하고, 이를 아무렇지 않게 인식하는 분위기를 짚어냈다. 가정 내에서도 나이 질서가 무시될 정도로 강력한 남성의 질서, 그래서 어머니가 (남편은 물론이고) 아들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상황을 언급한다. 

"기준은 아랫사람 대하듯 자기 엄마에게 충고를 늘어놓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내 눈에는 그가 마치 작은 효진이 아빠처럼 보였다. 효진이 아빠도 아줌마에게 그렇게 소리치곤 했으니까. 그럴때면 아줌마는 아들의 기분으 살피며 머쓱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그 이상한 웃음이 아들에 대한 노골적인 굴종의 포즈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이해하게 됐다." 143/702, 리디북스 


'지나가는 밤'

읽은지 며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매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것 같다. 이 소설에 나오는 언니와 동생 (윤희와 주희)의 관계는 '그 여름'에 나오는 수이와 이경의 관계를 조금 닮아 있기도 하다. 한 명은 상대방이 어떻게 대하든 무한한 사랑을 준다는 것. 동생이 언니에게 그러하였고, 수이가 이경에게 그러하였다. 그러나 역시, 주희도 이해가 가고, 윤희도 이해가 갔다. 주희의 착한 마음이 안쓰럽게 느껴졌고, 윤희의 단단함 그리고 그 단단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는 생각에 또 마음이 쓰였다. 이렇게 읽는 이로 하여금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가 화자의 입을 통해 그려낸 인물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지 싶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이 소설들은 읽으면서 '맞아맞아.....' 고개가 끄덕여지고 또 눈물도 났다. 


 

해외에 살고 있어서, 종이로 된 실물 책이 없다. 리디북스를 통해 구매한 책 표지. 그래도 해외 발행 신용카드로 구입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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