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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May 10. 2021

강건한 버팀

이민간 언니가 어버이날을 보내는 법

십대때부터 팬이었어요. 양희은 선생님. 

    하, 세월이 좋다. 이렇게 나는 한국에서 수천만리 떨어져 있어도, 몇번의 터치만으로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을 내 손 안에 전자책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 맛을 어찌 본토의 서점에서 종이책으로 나온 책을 만지고 읽는 기쁨에 비할 수 있으랴만은, 나는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공인인증서'의 벽에 걸려 타향살이에서 모국어로 된 책읽기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이 고작 몇 년 전이니 말이다. 

    팟캐스트에서 이 책 출판 소식을 들었다. 가수 양희은님의 에세이집 "그러라 그래"가 출간되었단다. 팟캐스트 소개말(김하나의 측면돌파)을 듣고도 나는 흠뻑 빠져들었다. 책의 표지 그림과 삽화들도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책에 대해서 전부 이야기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과 더불어 오늘은 미국의 어머니의 날이고, 어제는 한국의 어버이의 날이었으니, 그 날들을 내가 어떻게 또 잘 건너왔는지 말하고 싶다. 

    당연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양희은 이라는 가수는 멋모르고 중학교때 들었던 청바지를 입은 이십대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들자 가장 많이 들어온 이미지와 글은 칠십대 여성의 이야기였다. 아, 세월이 그렇게도 빠고 무섭다. 그리고 작가는 서두에 이렇게 말한다. '부디 강건히 버텨 주세요. 그래서 같이 만납시다.' (내 식대로 해석한 것이며, 내용이 그대로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열살이건 일흔이건 모두 이 시간의 강을 각자의 힘으로 버텨내고 건너가고 있다. 


먼 곳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 

    맞다. 나는 이민을 왔다. 그걸 하면서 마치 인어공주처럼 내가 맞바꾸어야 할 무엇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날 그 장소에 없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며 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들과 눈물을 내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해외에 있으면 특히나 나는 그 나라의 명절 혹은 한국의 명절이 싫다. 평소에는 별 일 없이 무탈하게 잘 굴러가는 것 같은 마음들이, 유난히 그런 날들에는 덜컹대고 시끄럽게 난리를 피운다. 남들은 이렇게 가족과 친지들과 모이는데, 너는 왜 여기 혼자 있냐고 내 마음이 그렇게 나를 타박하는 것 같다. 어버이날이니까,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근~사한 레스토랑 (그렇다. 그건 꼭 레스토랑이어야 한다. 식당이 아니고 말이다.)에 가서 멋진 식사를 함께 하고 또 가능하면 뭐라도 선물을 마련해서 안겨 드리고 싶다. 하지만 노 노. 그럴 수 없다. 내 일터가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내 밥줄이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런 마음들을 먼지털듯 탁탁 털고 일어난다. 대신 내가 행동으로 옮긴 것은 다음과 같다. 


어버이 날 전에 송금을 한다. 

많은 금액은 아니다. 그래도 내 수준에서, 내 깜냥에서 가능한 한도에서 나는 마음을 송금한다. 그래도 이것도 조금은 일찍해야 한다. 뭐든지 조금 일찍해 놓아서 손해보는 일은 없더라. 또 나는 이렇게 부모님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시간적으로 조금 서둘러본다. 


부와 모에게 전화를 한다. 

생각하면 조금 웃긴 말일 수 있으나, 나는 나와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 아빠와의 관계가 모양과 색이 좀 다르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했다. 아빠에게 전화를. 엄마에게 전화를. 내가 용돈을 부쳤다고 하니, 아빠는 너무도 싫은 내색을 한다. 아이고! 왜 그랬어! 안그래도 돼. 나는 잘 지낸다! 아버지의 단단하면서도 놀라워하는 그 목소리를 나는 사실 듣는게 좋다. 아주 짧은 그 순간이나마 내가 뭔가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삶에 보탬이 된 것 같다. 혹은 그 짧은 아빠의 놀라운 목소리에 엄청난 삶의 생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나를 생각하며 내가 드린 용돈으로 병원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맞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챙기는 힘도 큰 지혜다. 나는 부모가 되지 않았다. 마흔이고, 자녀가 없다. 그래서 부모의 진짜 마음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하게 아는 한 가지는 어떤 부모도 자녀에게 짐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짐이나 부담. 엄마가 병원에 가면서 우리 딸이 준 용돈으로 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는 단호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시어머니와도 통화를 했다. 

남편에게 효도는 셀프라고 누차 강조한다. 그건 가족제도 안에서 여자에게만 강요되는 것이 싫어서 하는 말이다. 결혼을 해 보니, 정말로 이건 가족과 가족의 협업이더라. 그래서 그 하모니의 핵심에는 각자 잘 지내는 것, 그리고 일대일의 관계도 잘 유지하는 것. 어머니의 날에 나보다 더 효자인 남편이니까. 알아서 했겠지. 하면서도 내 안의 '며느리 유전자'가 자꾸 남편을 부추겼다. 야야. 빨리 뭐라도 해 드려. (맞다. 조급함이다.) 그러다가, 그냥 내가 손을 썼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이 좋았다. 그걸 바로 배송을 눌렀다. 한국의 총알배송만큼 무서운 속도는 아니었지만, 제시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머님과 통화를 했다. 아들은 한국에 있고, 며느리는 미국에 있는 이 상황. 어머님은 그래도 고마움을 표시해 주셨다. 나는 또 그 마음을 감사히 잘 받았다. 


울적해 지지 않으려 꽃화분을 샀다. 

이 작은 아파트에 월세로 혼자 산지도 어언 일년이 넘었다. 이 작은 아파트에 낸 나의 월세를 생각하면 신경질이 치솟을 것 같지만,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 집에 살면서 일종의 복수심에서였는지, 화분 하나를 제대로 사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장을 보러 갔다가, 마트 앞에 촤라락 펼쳐 놓은 화분과 꽃들을 보니 마음이 갔다. 아,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저걸 사서 차에 실어서 부모님께 갖다 드리겠지.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민자는 마음이 어두워진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 여기에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야 다시 마음에 불이 켜 진다. 그래서 난 그냥 그 화분을 내돈 주고 샀다. 결국 효도도 내가 먼저 밝은 에너지를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강건한 버팀 

    토요일이라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은 이 늘어지는 몸과 거기에 따라 오는 침대에서의 느적거림이다. 그렇게 정오까지 허탕을 쳤다. 그러다가 이러면 안되지, 하며 머리를 흔들어 꾸역 꾸역 체육관으로 갔다. 맞다. 체육관에 돈을 내는 것이 돈지랄이 안되기 위해선 정말로 '분연히 떨쳐서고' 일어나야 한다. 북한말로는 그걸 '일떠선다'라고 하는 것 같다. 수영을 했다. 백신도 이차까지 맞았고, 이주가 흘렀고, 물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마스크를 쓴다. 어쨌거나 운동을 했더니 몸이 급피곤해왔고 급허기짐이 찾아왔다. 집에 왔다. 좀 시간이 남았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 수 없는 시간. (한국은 새벽이니까) 그렇다고 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쓰지는 않는 게으른 시간. (글을 쓰려면 또 한번의 마음의 일떠섬이 필요하다!) 누군가와 말은 하고 싶은데, 막상 생각나는 사람은 그녀였다. 엘 할머니. 사실 어머니의 날을 생각하고 전화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녀 생각이 났다. 팔년 전 오클라호마에 살때 내게 심적인 의지가 되어 주었던 분.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는 삼사개월 전이었다. I sold my car. I am ninty one years old, you know. I can't see well. I see my empty garage. I feel strange, but that is what it is. (내 식으로의 해석) 나, 이제 아흔 한 살이란다. 앞이 잘 안 보여. 책도 읽을 수 없어. 그러니 운전을 못하는 것도 당연해. 그래서 친척 누군가가 차가 필요하대서, 거기에 팔았어. 빈 차고를 보면 좀 마음이 허전하지만 어쩌겠니. 나인디 원. 구십 일세. 그녀의 나이를 들으니 현실이 탁,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여든 네 살이었을 때 나는 서른 둘이었던 것이고, 그때 우리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집 앞에 있는 아주 오래된 잡풀을 뽑아냈는데,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 잡풀이 그렇게 단단하게 땅에 뿌리깊히 박혀 있을 수 있던 이유는 그 잡풀의 나이가 그렇게 오래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가 거기에서 맞장구를 쳤다. 마치 할머니처럼요! 그렇지! 너가 내 말을 알아 듣는구나. 그래. 그렇게 힘있는 잡풀처럼 잘 버티면서 사는거야. 

    나이가 들수록 삶을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내 주변의 어른들은 그걸 힘들다고 징징대지 않는다. 다만 그 시간과 공간들을 잘 버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걸 나는 보고 배운다. 나의 칠십대, 구십대도 저들처럼 강건하게 버티리라. 근육을 키우고, 포기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글을 쓰는 것. 그리고 나이와 무관하게 영혼이 통하는 이들과 교류하는 것. 이것들이 내가 오랫동안 강건히 버틸 수 있게 하는 피와 살이 되지 않을까. 


*이 글의 내용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것을 금합니다. 

오월은 이렇게도 눈이 부시다. 2021. 5. 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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