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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May 30. 2021

강한 경상도 사투리

이민자의 모국어 원래화 현상

#들어가며

    어제 간만에 한국에서 친했던 언니와 통화를 했다. 나는 통화가  것이 반가워, 안그래도 튼튼한 목소리에  에너지와 반가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언니!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지내셨어요?" 문장으로  놓고 보니,  문장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퍽퍽 묻어나지 않는다. 다만 말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의 폐와 성대와 목울대에서 그렇게도 강력한 '갱상도 사투리' 튀어나오고 말았다.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은 언니의 첫마디는  이랬다. "혹시  강호동하고 고향이 같니?   같은게 아니라, 혹시 지역도 같니?"  언니의 생뚱맞은   질문의 속뜻을 파악하느라  분이 걸린  같다. !  말투에 심한 경상도 사투리가 있나 보다.......언니와 나는 멀리 있어도 가끔이지만 연락을 하는 사이고, 워낙 언니에게는 '개그의 ' 깊이 흐르는 사람이라, 저렇게 확실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처음엔 강호동? 크고 튼튼한 남자, 그리고 그의 몸처럼 튼튼하고 변하지 못할것 같은, 깊이 뿌리박힌 그의 경상도 억양이  오르자, 이상한 열패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 글을 다 쓰고, 조금 고치는 과정에서 나는 그렇게 튼튼한 사람의 이미지가 내 이미지와 겹쳐진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맞이했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결국 내 언어도 튼튼하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라떼는 말이야.......

캔버라 타운을 닮은 창원의 아이, 서울로 가다.

    시간을 거슬러,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경상남도 창원시다. 그때만 해도 창원시는 '캔버라 타운을 본따 만든 쌔 도시 느낌이 팍팍 나는', '소위 앞으로 잘 나갈 것 같은 미래형 도시' 이미지였다. 창원시의 쭉쭉 뻗은 크고 넓직한 도로는 창원의 자랑이었다. 나는 그 도시에서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이십년 세월이다. 그 이십년 세월의 한국어, 경상도어가 마흔이 된 내 삶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내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요놈의 내 '의식'이다. 조금은 더 세련되어 지고 싶다는 마음. 나도 '현대 서울말'을 쓰며, 좀 더 세련되고, 새끈하고, 교양이 넘치는 서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 새내기가 된 내가 주변 친구들과 선배들에게서 이목을 끌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나의 이 강력한 사투리였던 것이다. 참, 세상사는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게는 던져 버리고 싶었던 사투리가 서울 출신의 친구와 선배들에게는 뭔가 '귀엽고, 깜찍하고, 신기한' 그런 어떤 새로움이었다. 하아. 하지만 내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자꾸 그들의 서울말을 흉내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아마 나는 조금씩 그들과 언어를 섞으며, 내 사투리의 흔적을 남몰래, 조금씩, 때로는 의식하면서, 없애려고 했다. 방학때가 되면 창원에 갔었는데, 그때 친구들에게서 들은 훈장 같은 말은 "오, 니 인쟈 서울 사람 다 돼뿟네. 말투가 완전히 서울말로 바뀌뿟네!"였다. 그러니까 나의 이 노력들은 이상하게도 고향 친구들에게서만 인정을 받았다. 여전히 서울 사람들에게 내 이미지는 '경상도 여자' 였는데도 말이다.


#퇴화이냐, 원시화이냐, 원래화는 어때?

    그렇게 경상도 사투리와 현대 서울말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기가 지나고,  다시  이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는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미국에서  한국어는 여전히, 아니 어쩌면 더욱더 강한 경상도 억양과 강세를 가진 '갱상도 한국어 슨생님' 되어 버린 것이다. , 마이 갓뜨...... 나는  서늘한 차도녀를 꿈꿨다. 차도녀는 현대 서울말을 쓰고, 영어도 백인 영어를 쓴다. 맞다. 영어에도 분명히 지역색을 띈다. 다만 오성식 영어와 교재에 녹음된 '현대 미국인' 영어를 쓰는  발음에는 한국말을 할때 원래언어였던 경상도 말을 지우고 서울말을 하고 싶었던 자격지심이 없었다. 영어는 그저 내게 하나의 외국어였으니까. 그런데 십년 못돼는 미국에 살다보니 영어도 당연히 지역색이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한국어 선생님

    그렇게  간만에 본토와의 전화 연결이 되고 나자, 이민인으로서  언어의 위치가 새삼 확인되었다. 그래, 한창 서울에  때는 서울말을 쓰려고 용을 썼던 시기가 있었지. 나도 거기에 동화되고 싶었으니까. 지방에서  티를  내고 싶었으니까. 이십년의 세월에 담긴 자연스러운 경상도어를 바꾸려고 했었다. 그리고  해외를 돌고, 돌아, 나는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 이제 나의 위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그냥 가장  다운  가장 자연스러운  학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학생들과 나의 '시너지' 나쁘지 않다. 나는 수업을 일종의 ''처럼 느낄 때도 있다. 일단은 수업이 재미있어야  어려운 한국어를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선생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에 들어야 언어에 흥미를 붙일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예쁜 선생님으로 인식되고 싶은 마음별로 없다.  '예쁜 선생님' 되기 위해서, 새벽 같이 일어나 드라이를 하고, 화장을 하고, 렌즈를 끼고 하는 시간이 솔직히  아깝다. 학생들에게 나는 언어로, 쇼맨십으로, 재미를 제공한다. 영어를 최대한  쓰려고 한다. 그래야 머릿속에 '한국어 모드' 계속 켜져 을 수 있다. 어기적대고 뭉기적대는 한국어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출발해야 재미가 생긴다. 안그러면 우리는 일종의 기계가 되어, 한국어-영어 번역과 통역만 하다 수업이 끝이 난다. 그래서 '수학'이라는 말이  떠오르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 친구! 속으로는 싸이언스! 라고 통크게 외치고 싶지만, 꾹꾹 참는다.  영어 단어를 속으로 꿀꺽 삼킨다. 그러면 학생들의 머릿속에서 한번더 생각을  것이 아닌가. '과학의 친구?' 누군가의 머릿 속에서 과학의 친구가 수학이라는 사실이 불이 반짝 들어오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 더 핵심에 가 닿으려고 한다. 억양이 세고, 강세가 있으면 어떤가. 내 말을 상대방이 알아들으면 된다. 화장을 안하고 굽을 신지 않은 선생님이면 어떤가. 수업이 재미있고, 머릿 속에 한국어가 쏙쏙 들어오면, 그걸로 되었다.


2021년 오월. 현재는 다시 오지 못한다. 그러니 만끽해야 한다. 나의 한국어도 지금, 이 나이 마흔의 한국어일 터. 시간이 지나면 내가 바뀌듯 내 언어도 바뀔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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