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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되는 사람들

by 달숲


#1. 키오스크

즐겨가는 베이글 가게가 있다. 아니 있었다. 재즈음악과 활기찬 직원들의 에너지가 좋아 다시 방문하고 싶은 그런 곳. 베이글 맛도 일품이지만 공간이 갖고 있는 분위기가 좋아 지인들을 종종 데려갈 만큼 애정 하는 공간이었다.


단골 베이글 가게에 '그것'이 들어선 것은 6개월 전 즈음이다. 대형 패스트푸드점에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주문 키오스크가 들어섰다. 그 후, 가게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주문을 하며 주고받던 사람 간의 소통이 사라지며 기분 좋은 백색소음은 침묵으로 대체되었다. 짧은 몇 마디의 기회마저 사라진 것이다.


기계의 편리성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도려낸다. 한때 '정'이라 불렸던 혹은 '따스한 마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을 단칼에 잘라낸다. 그 행동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다. 기계가 들어선 곳에 인간이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쫓겨난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를 바라보며 무력함과 자괴감을 느낀다. '인간 소외'가 대량으로 생산된다.


예전에 한 뉴스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키오스크가 있는 음식점에 들어간 노부부가 주문을 하지 못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사실 우리 엄마만 해도 키오스크가 들어선 이후 베이글 가게를 찾지 않는다. 그곳에서 예전만큼 활기를 느끼지 못하는 나도 조만간 이곳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을 것이다.


#2. 횡단보도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신호가 너무 짧다'라는 생각.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편함 없이 거뜬히 건널 테지만, 걸음이 불편하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 시간 안에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을까. 나처럼 걸음이 느린 사람은 부지런을 떨어야 신호를 건널 수 있을 것이고 만일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건너는 도중에 신호가 바뀌어버릴 것이다. 그만큼 할당된 시간이 짜고 박하다. 잔여 시간을 나타내는 안내판의 숫자가 뚝뚝뚝 떨어질 때마다 마음이 급해지고 심장이 쿵쿵 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떤 집단을 기준으로 설계된 것일까.


보행자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자 차량이 일제히 움직이며 앞다투어 나아간다. 끼어드는 차량, 급정거하는 차량으로 도로는 이내 혼잡해진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가 도시를 가득 메운다.


#3. 타인의 고통

청년층이 취업을 못하는 것이 근성 부족 때문이라고, 개인의 실직은 무능 때문이며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나약한 마음 때문이라고 떠들어대는 사람을 보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걸까.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 아니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삶의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마음이 피폐한 사람은 대개 인정머리가 없다. 그들은 나의 것에만 집중한다. 나의 집, 나의 자동차, 나의 물건, 나의 성공. 오로지 나, 나, 나. 좁아진 시야 탓에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 타인이 아픔을 털어놓으면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식탁에 어떻게 빵을 올려놓을지에만 관심이 있다. 죽기 살기로 자신의 몫을 챙긴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빵, 조그마한 한 조각을 갖고 있는 사람의 것을 뺏는 것 따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타인이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나'의 식탁에 차곡차곡 쌓일 '나'의 빵조각 생각에 신이 난다. 그들은 눈이 멀었다.


#4. 노견을 산책시키는 여인

토요일 아침 산책길 유난히 느린 여인을 발견했다. 왜 그런고 하니 여인의 옆에는 그녀보다 더 느린 노견 한 마리가 걷고 있었다. 사실 걷는다기보다 '여인의 도움으로 걸어지고 있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개는 다리에 힘이 없어 스스로 걷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여인과 개는 개줄로 연결되어 있었고, 개의 몸통에 고정된 줄은 노견의 날개가 되어주었다. 여인은 줄을 살짝 들어 늙은 개의 몸이 내려앉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듯 보였던 노견이지만 세상의 냄새를 맡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일인가 보다. 노견은 느릿한 걸음으로 땅의 내음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움직임 뒤에는 여인의 인내심이 있었다. 여인은 노견을 사랑했고 그러므로 둘은 침착하게 산책길을 함께할 수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인과 노견을 다시 만났을 때 노견은 용변을 보는 중이었다. 그때도 여인은 재촉하는 것 없이 노견의 곁을 지켜주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결여되어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상대를 기다려주는 마음. 비어있는 공간을 기꺼이 채워주는 마음. 그런 것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며 퍽퍽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소외를 생산하는 사회. 단절되는 사회.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기술의 엄청난 혜택 너머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소외감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인과 노견이 보여준 모습이 내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글/캘리그라피 * 엄혜령

사진 * Unsplash (@Rostyslav Savch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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