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알다가도 모를 엄마와 딸 사이

by 달숲


며칠 전, 돼지저금통을 뜯었다


제법 묵직했던 돼지는 이십만 원 정도를 품고 있었다. 그 돈을 은행에 가져가서 통장에 입금했다. 간 김에 그간 밀린 은행 업무도 해결했다. 왠지 공돈이 생긴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좋아 가족에게 한 턱 내기로 했다. 그 날이 오늘 저녁이다. 철부지 막내딸이 치킨을 쏘기로 한 날. 그래서일까. 하루의 시작이 더욱 상쾌하고 설렌다. 어서 저녁이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후를 보내고 있다. 예전에 누군가 '한 줌의 행복'이란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그다지 큰 게 필요하지 않다고, 그저 한 줌 크기 정도의 행복만 있으면 된다고. 오늘 나의 행복 한 줌은 가족과 둘러앉아 먹는 맛난 치킨이 될 것이다.


다음 주는 엄마의 생신이다


부모님은 음력으로 생일을 챙기셔서 새해가 되면 엄마와 아빠의 생신을 달력에 표시해 놓는다. 그때만 해도 4월은 한참 후에나 올 것만 같았는데, 벌써 엄마 생신이라니. 하루와 하루는 너무나 닮아있기에, 달력에 표시해둔 생일 메모를 통해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가늠해볼 뿐이다.


엄마는 생일선물로 속옷을 받고 싶다고 하셨다. 코로나로 매장 방문은 어려울 것 같아 온라인 쇼핑을 하기로 했다. 별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넷에 속옷을 검색해보았는데, 무슨 속옷 종류가 이렇게나 많은지. 쇼핑할 때 대부분 목적구매를 하는 나에게 인터넷 쇼핑은 버겁고 피곤한 일이다. 페이지를 열심히 넘겨 보지만 제품은 거기서 거기인 것 같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또 품절이고, 아이고야. 만일 내 물건을 사는 거였더라면 대충 재고 있는 무난한 걸로 주문해버렸을 거다. 그런데 엄마는 본래 꼼꼼한 성격이고, 하나하나 디테일을 확인하고 구입하는 신중 파이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어쩜 우리는 이렇게나 다를까. 엄마의 생일 선물이니 '싸우면 안 된다'가 본래의 목표였기에 이에 충실하고자 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싸우지 않고 최종 구매를 할 수 있었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몇 년 전이었던가.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갑자기 우산이 갖고 싶다고 했다. 드라마 여주인공이 비를 맞는 장면이 유독 많은 드라마였다. 엄마는 긴 초록 우산이 갖고 싶다고 하셨다. 드라마가 흥행해서인지 여주인공이 쓴 브랜드는 어딜 가도 품절이었다. 그렇게 초록우산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었던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다 문득 초록 장우산을 갖고 싶어 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가끔 이렇게 맥락 없이 예전의 기억이 팝업창처럼 떠오르곤 한다. 아쉬워하던 엄마의 모습이 내심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궁금한 마음이 들어 예전에 구입하지 못했던 브랜드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재고가 입고되어 주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 없이 바로 우산을 주문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산은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 집으로 도착하였다.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에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 행복해하는 모습이 마치 소녀 같은 엄마. 그런데, 그렇게 받고 싶어 하던 우산을 갖게 된 엄마는 어찌 된 건지 싸구려 비닐우산만 주구장창 쓰고 다니는 게 아닌가. 이유를 물어보니 아껴 쓰시는 거란다. 망가지면 또 사드릴 텐데. 알다가도 모를 엄마이다.


그런 엄마와 오늘 산책을 했다. 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포근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좋은 점 중 하나는 엄마와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일단 공원에 도착하면 우리는 개인플레이를 한다는 것. 나는 달리고, 엄마는 느리게 걷는다. 평소 같았으면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했었을 테지만 오늘 엄마는 함께 걷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서 가볍게 통통 걸으며 엄마와 보폭을 맞춰나갔다. 겨우내 비어있던 나무에 어느새 초록잎이 가득 달렸다. 공원의 청량한 에너지와 내리쬐는 햇살이 기분을 좋게 한다. 곧 무더운 여름이 시작될 것이다.


지난주에는 엄마와 싸우고 눈물로 화해를 하였는데. 오늘은 또 이렇게 꽁냥꽁냥 사이좋은 모녀이다. 우리 집 두 남자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이따금 나도 헷갈리는 엄마와 나 사이. 모녀 사이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