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는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은퇴를 앞둔 아빠의 소원이 있다면 오빠와 내가 좋은 짝을 만나 속히 결혼을 하는 것.
옛날에는 '이쁜 우리 딸내미를 어느 놈팽이(?)가 감히 넘봐? 안될 일이지!' 분명 이런 느낌이었는데 30대 중반이 되니 은근슬쩍 아빠가 변했다. 물론 그렇다고 결혼을 닦달한다거나 대놓고 압박을 주시지는 않는다. 다만 몇 년 전부터 TV에 결혼식이 나온다던가 사촌 중에 누가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돌리기라도 하면 마치 들으라는 목소리로 아쉬운 듯.
‘아니, 우리 애들은 언제 즘…?’하며
스윽 내 쪽을 슬그머니 쳐다보시는 게 아닌가..!
즐겁게 TV를 보고 있다가도 은근한 아빠의 한 마디가 툭 던져지면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괜스레 눈을 깜박거리게 된다. 하지만 어디 이런 걸로 쉽게 기죽을 그런 딸내미인가 내가!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큰 소리로,
“아니 아빠~ 그럼 뭐 길 지나가는 남정네 하나 붙잡아서 확 결혼하자고 그래버릴까? 맘만 먹음 결혼 당장 담달도 한다고~!”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그래도 우리 딸 얼른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아무래도 아빠의 머릿속에는 ‘결혼=행복’의 공식이 있는 듯하다. 그나저나 저야말로 좋은 사람 만나 얼른 결혼을 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혼기가 찼다고 후다닥 해치우듯이 혼인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결혼도, 출산도 이미 늦어버린 마당에 난리 떨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지금은 신중해야 할 타이밍이다.
그래도 갓난아기한테 눈을 못 떼는 울 아빠를 보면 달덩이 같은 손주 하나 안겨드리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빠 때문에 애를 낳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결혼도 안 했으면서 항상 생각은 몇 스텝을 앞서 나간다. 우습다 우스워.
모태 쿨녀인 엄마는 혼자서 즐겁고 산뜻하게 살 수 있다면 독신으로 살아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 힘든 세상 둘이서 으쌰으쌰 뜻을 맞춰가며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라는 입장.
딸내미의 기질이 본디 잡생각이 많고 쉽게 우울에 빠지는 성격이어서 내심 걱정되시겠지. 나로서도 괜찮은 인연이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을 ‘적절한 타이밍’에 만난다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근래 들어 새삼 깨닫고 있다.
아부지 은퇴하시기 전에는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막상 내년이라고 하니 이미 물 건너간 것 같기도 하고- 자식으로서 죄송한 마음이 든다. 한두해 지날수록 빠르게 늙어가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면서 '하루빨리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건 뭐 나의 욕심일 뿐.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고 믿는다.
순리에 어긋나려 하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해나가며 즐겁게 일상을 보내야지. 그러다 보면 좋은 인연이 때맞춰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나이를 먹어서, 아니면 혼자인 것이 두렵고 외로워서 급하게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딱히 대꾸할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인생이니 마음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도 되지 않을까.
몸과 마음이 조화롭고 생명력이 넘칠 때 만나게 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싶다. 혼자일 때 건강하고, 둘이 있을 때에는 더욱 빛이 나는 관계. 그것이 내가 꿈꾸는 미래이며, 은근한 결혼 압박에도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