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말 참 안 듣는 딸

by 달숲


엄마는 외갓집에 가고

오랜만에 아빠와 단 둘이 점심을 먹었다.


수다 점유율이 높은 엄마가 없으니

침묵이 함께하는 고요한 식사 시간이다.


이윽고 소화겸 나선 부녀의 산책 길,

한참 들이던 아빠가 어렵게 말을 건넨다.


"달숲아 아빠가 할 말이 있는데...

우리 딸, 염색하면 안 되겠니?"


작년 2월부터 새치 염색을 그만뒀다.


미용실 가서 염색하는 것도 귀찮고 쏟아붓는 돈과 시간도 아까웠다. 게다가 누굴 위해 염색을 하?를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1)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2) '남'에게 잔소리 듣기 싫어서


두 가지 이유가 가장 크단 걸 깨닫고 관두기로 했다.


물론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염색을 그만둔 것이다.


흰머리는 중학생 때부터 함께였다. 조상님으로부터 대대손손 내려오는 강력한 유전자의 신비는 딸이라고 피해 가는 법이 없었다.


아빠 입장으로서는, 절대 닮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에게 물려줬으니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쑥쑥 자라는 딸내미의 머리통에서 새싹처럼 흰머리가 쏙쏙 올라왔을 때 아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로서도 새치가 나는 것이 절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이 대놓고 무안을 줄 때도 있고, 외모에 한창 관심 있을 사춘기 시절에는 유독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속상하고 분한 마음에 방구석에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며, 뭐 이대로도 나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염색을 하지 않고 있다.


가끔씩 흰머리 있는 미혼 여성을 좋아할 남자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요즘엔 뭐랄까, 생긴 대로 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중이다. 이따금씩 태클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어찌 됐건 지금까지는 이상무.


그런 이유로 아빠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말 참 안 듣는 딸내미.


그래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있잖아, 나는 지금의 내가 좋아. 흰머리가 싫었을 때도 있었는데 이젠 괜찮아. 게다가 아빠는 내게 정말 많은 것을 선물해 줬잖아. 흰머리만 준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해하지 마. 나는 아빠한테 고마운 것 밖에 없는데. 혹시 내가 흰머리 길러서 부끄러운 거 아니지?"


"에이, 그런 건 아니지"


"그럼 그냥 염색 안 할래. 특별해지고 싶어서 별짓거리 다하는 세상에 흰머리 기르는 거야말로 유니크함 아니겠어? 어차피 염색해 봤자 일주일 지나면 다시 허옇게 올라와서 더 지저분해 보여. 나는 걱정 마. 그러니까 아빠도 앞으로 그런 마음 갖지 마. 미안해하지 말고 우리 가족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자."


대답을 들은 아빠는 말이 없다.


워낙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아빠여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지만, 그래도 침묵이 꼭 나쁜 의미는 아닐 것이다.



30대 후반이면

자연스레 흰머리가 나올 시기이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효일 테지만,


자신의 방법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어찌 보면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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