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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쓰다 Mar 27. 2024

별에서 온 그대?

-그대 이름은 하숙생

2023년 12월 30일. 올해도 이틀 남았다. 그런데도 12월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내 나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2023년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바닥난 체력은 몸살로 이어졌고 몸살과는 별개로 계속 신경을 쓰는 일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계속 힘들라는 법은 없는지 크리스마스 즈음 그중 가장 애를 태웠던 문제에 산타할아버지는 "문제해결"이라는 선물을 주고 가셨다.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정신적으로 꽤 힘들었는지 기쁘다는 느낌도 없었고 그저 후련했다. 그리고 며칠 후 산타가 그 선물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 또 다른 선물을 놓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쓰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어린이도 아닌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더니 아무래도 추상적인 선물로는 성에 차지 않으셨나 보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안 그래도 갱년기라 열이 올랐다 내렸다 제멋대로인데 거기다 가슴까지 답답하다.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거실에 추상화를 그리고 있고, 보다 만 책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지우개 똥 매트가 깔린 책상 위에는 공부하다 만 문제집과 공책이 아슬아슬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 쌓여 있고 연필, 색연필, 지우개는 자기 집을 못 찾고 아무 데나 굴러다니고 있으며, 알맹이만 쏙 빼먹고 버린 젤리 포장지, 빨대 꽂힌 빈 요구르트 병과 과자 부스러기가 책상 한쪽을 장식하고 있다. 정리하라는 말을 언제부터 했을까. 초등 6년간 매일 하지는 않았을 테니 365일을 6번 곱한 2190일에서 조금 떼 낸 1500번 정도는 말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좀 알아들을 만한데 어쩜 이리 변화가 없는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1500번이 약했나. 아니지. 하루에 한 번만 하지는 않았으니 적어도 세네 번은 했다고 치면 적어도 5000번은 했을텐데 이 정도로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도저히 이해불가다. 좀 더 정성껏 얘기했어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가 싶어 괜시리 자책을 한다.


조금 있으면 중학생이 되니 예습은 못해도 복습이라도 해야 한다고 목청 높여 외치면 그때뿐, 귓등으로 지나간 잔소리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처럼 아이한테 다시 돌아올 기미가 없다. 처음부터 목소리 톤을 올렸나 반성하며 복식호흡을 하고 이너피스를 속으로 되뇌며 차분하게 얘기를 한다. 그러나 점점 올라가는 옥타브는 더는 오를 수 없을 때에 정점을 찍고 결국 나만 성질이 난 상태로 숨을 헉헉거리게 된다. 나도 이렇게 고음을 낼 수 있었구나. 아이 덕분에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목청 틔우기는 끝이 난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의 성량에 놀란 건지 엄마가 불쌍해 보였는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드로 넘어간다.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쓰는 비속어를 이제는 거리낌 없이 쓴다. 몇 번 주의를 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때가 그럴 때라고 하니 조금 크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장난으로 쓴다지만 이제는 말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 있는 비속어가 싫어서 혼을 내다 남편에게 도움을 청한다. 남편은 남자아이들은 다 그러면서 큰다며 그 속에서 친밀감과 유대감을 갖는다는 어이없는 말을 자랑스럽게 내뱉는다. 말인지 발인지 모르겠다며 눈을 흘긴다. 그러다 드는 생각. '내 애한테도 그 무섭다는 사춘기가 오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래도 예뻤다. 말 안 듣는 것과 비속어 사용은 다른 아이들도 비슷하다 하니 그리 걱정할 것은 아닌 것 같고 어느 때는 맘에 쏙 드는 말과 행동을 할 때도 있어서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여전히 내 눈에는 아기 같고 어리게만 보였다. 또 믿는 구석도 조금은 있었다. 아직 우리 애는 다른 애들보다 몸집도 그리 크지 않고 변성기 시작도 안 됐고 눈빛도 아주 멀쩡하게 보이니 사춘기가 좀 늦게 오거나 오더라도 심하게 오지는 않을 거라고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2024년 1월까지는 그랬다.

 


이 때는 몰랐다.

산타할아버지의 또 다른 선물이 하숙생이었음을.

하숙생을 맞이할 마음의 유예기간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시간이 흐른 2024년 2월 어느 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하숙집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숙생: 일정한 돈을 내고 남의 집 방에 머물며 먹고 자고 하는 학생


산타는 이 하숙생을 도대체 어느 별에서 데리고 온 걸까? 예전 드라마 주인공처럼 '별에서 온 그대' 같으면 맨발로 달려가 맞이했겠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우리 집 하숙생은 안하무인(자기가 말하는 게 다 옳다며 내가 하는 말에 태클 걸고 상대하지 않으려 함)에 우이독경(몇 번을 오라고 하면 가고, 계속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하면 굳이 저렇게 함)이고 무전취식(자신에게는 상관말라는 하숙생이면서 밥은 공짜로 당당하고 먹고 아주 당연하게 원하는 음식을 시도 때도 없이 요구함)이다. 평소대로 물어보면 들리지 않는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대답을 안 한다. 몇 번 묻다 큰 소리로 물으면 그제야 간신히 대답한다. 궁금한 게 있어도 물으면 안 된다. 내 질문의 답은 대부분 5지 선다형이다. '몰라', '말해줘도 몰라', '그런 게 있어', '나중에', '무응답' 중 하나. 나중엔 지쳐서 묻고 싶지도 않다.


그나마 하숙생이 하는 대답 중 가장 최선의 답은 '내가 알아서 할게'였다. 두고 보자는 놈치고 하나도 안 무섭다더니 알아서 하겠다는 놈치고 제대로 하는 놈 없다. 이 하숙생, 알아서 하겠다는데 정작 하는 건 하나도 없다. 내 말이 어렵고 퉁명스러운가 싶어 최대한 정제된 언어로 듣기 싫지 않게 말을 해도 막무가내 자기 고집만 피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겠단다. 고구마 만 개 먹은 것처럼 속이 꽉 막혀 숨이 안 쉬어지는 때도 있다. 그러나 미성년자 무일푼에 자신의 능력이 현재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못하는 천방지축 하숙생을 외면하고 험한 세상으로 무조건 내칠 수도 없다. 대책없는 하숙생 혹여 반항끼가 다분히 섞인 눈빛과 말에 맞대응하면 이상한 데로 튈지 몰라서 하고 싶은 말도 꾹 누르며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야말로 나만 죽을 맛이다. 소문에는 꽤 괜찮은 하숙생도 있나 보던데 부럽다. 주위에 하숙 여러 명 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몇 년 전 내 친구는 하숙생 때문에 자기가 가출하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었다. 난 아직 시작에 불과한데 어쩌나 싶어 한숨이 나온다.


올해부터 어린이 졸업하는 아이 크리스마스 선물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선물 안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타한테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심란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이왕 우리 집에 온 하숙생이니 제자리 찾을 때까지 잘 데리고 있으면서 삐딱선 타지 않게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앞이 너무 막막하다. 안 그래도 남편과 자식 덕분에 가슴에 돌멩이가 쌓여 가고 있는데 이제는 짱돌까지 얹어야 할 것 같다. 이러다 큰 돌무덤 하나 나오게 생겼다.


'아, 진짜 하숙집 아줌마는 하기 싫었는데.'


이렇게 2024년 초봄 나는,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중1 하숙생과 동거를 시작하기로 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상단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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