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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쓰다 Apr 03. 2024

학생, 수도세 내!

"쏴아~"

욕실에서 물소리가 요란하다. 하숙집 학생이 샤워하는 소리다. 잠시 후 하숙생이 나오면 욕실에서는 금방이라도 신선과 선녀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자욱한 수증기를 바라보며 오늘도 샤워 세례 받은 욕실 닦을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 '수도세 한 푼 안 내면서...'

이미지 출처: pixabay


요금이란 요금은 다 오른 것 같은 시국에 우리 집 하숙생은 샤워를 오래 한다. '오래'의 기준이 모호하긴 하나 평소 내가 샤워하는 시간과 비슷하거나 더 걸린다. 작은 몸 뭐 그리 씻을 데가 많은지 한번 들어가면 이삼십 분은 걸린다. 잘 안 씻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매일 아침마다 밥은 안 먹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이 닦고 학교에 간다. 여자친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내가 모르는 건가) 엄청나게 추웠던 작년 12월 말에도 꼭 머리 감고 가야 한다며 꿋꿋하게 샤워를 하고 학교에 갔다. 자고 일어나면 기하학적 공간으로 구성된 다양한 새집을 지어도 개의치 않았던 내 아들내미와 다르게 이 하숙생은 아침마다 샤워를 하고 저녁에도 몸을 닦는다. 귀찮을 만도 할 텐데 날이 가면 갈수록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여서 더 놀랍다.


사람이 청결 유지를 위해 자기 몸 자기가 닦는데 뭐가 문제가 될까마는 중요한 건 그렇게 펑펑 쓰는 물값도 안 내면서 아침마다 목욕탕을 물바다로 만들고 간다는 거다. 샤워부스 칸막이 없는 욕실에서 얌전히 좀 하면 좋겠는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물 튀지 않게 해 달라는 당부의 말을 몇 번이나 했는데도 여전하다. 자욱한 연기가 휩쓸고 간 그곳에는 출입문을 제외한 삼면의 벽은 물론이거니와 형태 모를 물방울무늬의 거울 아래에 위치한 세면대 위 물받이와 변기 뚜껑에는 물천지다.


하숙집 바깥양반은 자기 몸 닦는데 드는 시간의 세네 배 되는 시간 동안 쏟아지는 물이 몹시 아까웠는지 몇 번 '물아까워쓰지마.'라는 고릿적 말개그로 돌려말하거나 나중에 수도요금을 물리겠다는 협박조로 대놓고 핀잔을 줬지만 하숙생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남편은 점점 샤워하는 횟수와 물 쓰는 양이 늘어날 것을 걱정하며 나중에 하숙생 집 나갈 때 정산해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숙생 집 나가려면 아직 멀었어. 누가 그러는데 그냥 삼재라 생각하래. 들삼재, 눌삼재, 날삼재 합쳐 3년은 생각하고 지내래.'

차마 남편에게 이 말은 하지 못했다.



한술 더 떠서 이 하숙생 샴푸향에도 까탈을 부렸다. 한 번은 쓰던 샴푸가 다 떨어졌다면서 사다 놓기를 요구했다. 이제는 무향이 싫다며 향이 좋은 걸로 사다 달란다. 지금껏 살면서 정말 이상한 향 아니고서는 샴푸향에 대해 무관심했던 나로서는 이런 요구사항이 좀 당황스러웠다. 그래, 향 중요하지. 모두들 자기만의 향을 가지려 그토록 노력하는데 머리카락에서만이라도 좋은 향을 낼 수 있다면 자신도 좋고 더불어 남도 싫어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럴 수 있다며 성분도 괜찮고 향도 좋은 샴푸 찾기에 돌입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인터넷 장보기에 샴푸를 검색 후 상세페이지를 꼼꼼하게 보면서 이제는 어떤 향이 나는지도 일부러 찾아서 확인해 보았다. 글자를 통해 뇌로 들어오는 향을 십수 년 간 샴푸를 써 본 내 경험을 토대로 유추한 후 구매후기까지 찾아 읽으며 고심 끝에 결제를 했다. 다음날 배송받은 샴푸에 좋아라 하며 바로 써 본 하숙생은 향이 나서 좋기는 한데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소용량이 없어서 대용량으로 샀는데 어쩔 없으니 주는 대로 쓰라고는 했지만 시간들인 보람이 없으니 좀 맥이 빠졌다. 뭐냐, 지금. 하숙생 비위 맞추지 못했다고 이리 힘이 빠지다니.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넘어가면 안 된다. 언제 나한테 태클 걸어올지 모르는데 뭐가 예쁘다고 마음을 쓰는지 좀 한심해진다.


대용량 샴푸를 빨리 소진하기 위해 하숙생 몰래 나까지 합세하자 드디어 샴푸 끝이 보였다. 그리고 며칠 전 어김없이 하숙생이 요구를 했다. 향 좋은 샴푸 사달라고. 이번에도 열심히 검색을 한다. 성분과 가성비와 향까지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프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결제했다.

"향이 너무 좋아요."

오, 합격인가. 입가에 흘러나오는 미소를 애써 감추며 심드렁하게 마음에 드니 다행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은 척 툭 던졌다.



하숙생은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샤워를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나오며 한마디 한다.

"오늘은 왜 머리가 뻣뻣하지?"

어쩌라는 건가.

바꾼 샴푸가 이상하다는 건가.

그래서 다른 걸로 바꿔달라는 건가.

매일 같은 샴푸로 감았는데 오늘만 느낌이 다른 건 네 문제거든.

두세 마디... 열 마디 하려다 뒤로 돌아 설거지를 시작한다.


그리고

둘다 아무 말이 없었다.


'내일도 뻣뻣하다 하면 안 되는데... 샴푸 바꿔야 하나.'

코끝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사과향이 나쁘지 않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상단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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