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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쓰다 Apr 18. 2024

절대 궁금해하지 마!

하숙생이 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났다. 여느 집 하숙생처럼(아니 우리 집만 그럴지도 모른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고 남는 시간에는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며 지냈다. 웬일로 책을 읽는구나 싶어 들여다보면 만화책을 보고 있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보고 또 보고..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고3 수험생처럼, 고시생처럼 보고 또 본다. 숙제도 좀 하고 다른 책도 좀 보라는 말이 단전에서부터 중력을 무시한 채 빠른 속도로 내 턱밑까지 차오르지만 쓰레기로 꽉 찬 종량제쓰레기봉투를 누를 때의 천만 배쯤 되는 힘으로 꾹꾹 누르며 오늘도 간신히 위기를 넘긴다. 


성격은 까칠한 츤데레로 정했나 보다. 드라마에서나 멋있지 실제로는 너무 싫어하는 타입인 츤데레 스타일의 하숙생은 기분 나쁘게 나를 들었다 놨다 했다. 어느 때는 엄청 툴툴거리고 밉상이라 어디 갈대밭에 가서 욕이라도 한 트럭 갖다 퍼주고 오고 싶다가도, 어느 때는 갑자기 다정하게 굴어 혹시 어디가 아프거나 무슨 대단히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어 가슴이 쿵쾅거린다. 이럴 때는 가슴은 두근거리지만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하늘로 붕 떠오르는 것 같은 증세에 하숙생을 탓해 보지만 사실은 그 모습에 잠깐 반했나 싶어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갱년기 증세 중 가슴 두근거림이 있다는데 그래서 그런 거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하지만 간혹 환한 웃음을 아주 잠깐 나한테 선사할 때면 줏대 없이 내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어쩔 수 없었다. 더불어 말도 나긋나긋해지고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속도 없는 하숙집 안주인이다. 하숙집 주인양반은 하숙생 때문에 매일 속 끓이면서 뭐가 그리 좋냐며 혀를 찼다. 평소에 나에게 하는 말과 행동을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자동반사되는 이 상황은 나 스스로도 통제불능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세 잎클로버 속에서 네 잎클로버 찾기만큼이나 드물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그냥 하숙생이려니 생각했는데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보니 하숙생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다. 되도록이면 안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다. 숙제는 다 했는지 준비물은 다 챙겼는지, 선생님들은 어떠신지, 친구들은 어떤지 등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물어본다. 열 가지를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세, 네 개다. 그것도 그나마 대부분 '몰라'나 '나중에'다. 이 한마디 하는 데에도 엄청 뜸을 들이고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내가 못 물어볼 것 물어본 것도 아니고 돌봐주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지 않나 싶다가도 아니지, 그저 하숙집 아줌마인데 너무 들이댔나 싶기도 하다. 하숙생 말처럼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살겠다는데 뭐 그리 궁금한 게 많고 관심이 많은지, 내 할 일도 많은데 그냥 두면 될 것을, 옛날 어느 고전문학에서 본 것처럼 다정도 병인가 보다.


그래도 아주 형편없는 하숙생은 아니라 기분이 썩 괜찮거나 그래도 한마디는 하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드는 날은 대강 어느 정도 선에서 대답을 해준다. 너무 대강이라 궁금한 게 더 있지만 딱 거기까지만 듣고 더는 묻지 않는다. 더 물어보면 둘 다 감정 상하는 일이 분명 일어날 것임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곱게 입을 다문다. 성의 있는 대답은 애초에 기대도 안 하기 때문에 이런 날은 왕에게 눈길 한 번 받은 무수리처럼 그저 무한정 고마울 따름이다.



하숙생과 하숙집 아줌마의 대화는 별게 없다. 그 흔한 안부인사는 하숙생이 정해진 시간대로 집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보고 짐작한다. 하숙생이 처한 상황은 뭘 열심히 찾고 있거나 다급하게 나를 부를 때를 제외하고는 그리 시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눈치로 알 수 있다. 아주 사소한 것이든 중요한 것이든 물어보면 안 되고 때로 궁금해서 물어보면 오히려 더 답답하기만 하다. 학업에 대한 건 절대 물어보면 안 된다. 국가기밀이라도 되는 양 알면 다친다. 사실 알고는 있으나 물어보지 않는다. 굳이 물어봐서 좋을 게 없으니 그냥 두고 볼 뿐이다. 진로문제에 대한 물음은 꿈도 못 꾼다. 전에는 그래도 곧잘 말하고 허무맹랑한 얘기도 하더니 요새는 물으면 짜증을 낸다.


우리 집 하숙생한테 주로 듣는 답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단답형

"학생, 학교에서 잘 보냈어?"
"네."

"학생, 공부하기 힘들지? 어때?"
"네."


2. 동문서답형(내 말을 건성으로 들음)

"학생, 오늘은 간식 뭐 사 먹었어?"
"네."
"아니 뭘 사 먹었냐고?"
"뭐, 그냥 그런 거요."

"밥 좀 더 줄까?"
"네." (밥을 더 퍼 준다.)
"저 배부른데요."
"더 달라면서?"
"아닌데요. 제가 그렇게 말했나요?"


3. 아무 때나 '잠깐만'형

"얼른 와서 밥 먹어."
"잠깐만요."

"학원 갈 시간 됐어."
"잠깐만요."

"학생, 이리 와서 이것 좀 도와줘."
"잠깐만요."


4. 무응답으로 회피형

"학생, 숙제는 하고 게임하는 거야?"
"..."

"학생, 책상 정리 좀 하지 그래?"
"..."


5. 귀차니즘형

"선생님은 어떤 분이셔?"
"몰라요."

"학원생활은 어때?"
"몰라요."

"학생은 나중에 어떻게 살고 싶어?"
"몰라요."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도 이랬을까. 냉수를 마셔도 해갈이 안 되고 창문 열고 찬바람을 쐐도 식지 않는 답답함에 몸에서 사리가 우수수 쏟아져 나올 판이다.



그런데 이런 하숙생에게도 하숙집아줌마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저녁메뉴'다.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데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어째서, 나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저녁메뉴 요구와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은 당일 저녁메뉴는 그리 잘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데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 사항이 많다. 학원 끝나고 오는 도중에도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식사 메뉴를 묻는다.


공짜로 하숙하고 있으면서 참 뻔뻔하다. 그냥 있는 반찬으로 차려주겠다 하면 다른 먹고 싶다고 한다. 요구하면 내가 아무거나 바로 뚝딱뚝딱 만들어 내요리사, 아니 요술램프 속 지니의 후손쯤 되는 줄 아나보다. 폭풍성장기, 있는 마지막 시기 하니 항상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매일 고기반찬과 시켜 먹는 치긴, 색다른 음식으로 밥상을 차려주지는 못한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하는 하숙생의 저녁메뉴 질문은 안 그래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 갱년기 아줌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내가 묻는 말에 정성껏은 아니더라도 시원하게라도 답해주면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마음으로 저녁메뉴에 공을 좀 더 들일텐데 우리집 하숙생은 그걸 모르고 저녁메뉴에 진심이다.

이미지출처: pixabay


참, 그러고 보니 질문 싫어하는 하숙생도 대답하는 게 하나 있었구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말을 여기에 쓰는 게 맞나 싶지만, 다른 질문에는 대꾸도 안 하는 하숙생이 뭐 먹고 싶냐는 질문에는 바로바로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필요한 경우 부연설명도 곁들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숙집 아줌마의 본분을 잊지 않게 해 줘서! 이렇게라도 소통할 수 있게 해 줘서! 


한편으로 하숙생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하숙집 아줌마가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했다. 내가 잘못했네. 밀가루 음식 끊기만큼이나 힘들지만 작심일일 다짐을 또 한다. 속으로는 정말 궁금하지만 겉으로는 절대 궁금해하지 않기로, 대신 눈치 백 단 내공과 독심술을 더 연마하기로 말이다. 오늘은 저녁메뉴로 뭐가 좋을지 하숙생에게 내가 먼저 물어봐야겠다. '학생, 저녁메뉴 물어봐주고 대답해 줘서 고마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상단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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