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평소보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남편은 약속이 있다며 일찌감치 나갔다. 휴일에는 청소라도 하면 좋으련만 대단한 선견지명을 가진 남편이다. 끝나지 않을 설거지를 하고, 또 끝나지 않을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평일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청소를 미뤘더니 집 안 구석구석이 먼지다. 더더욱 햇빛이 비치는 이 구석 저 구석은 먼지옷을 입은 자신의 몸뚱이를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뭐가 그리 잘났는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이다. 쳐다보고만 있지 말고 얼른 청소하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것 같다. 매일 해도 쌓이는 먼지를 누가 막겠냐마는 먼지는 그렇다 쳐도 어린애가 있는 것도 아난데 집이 아주 난장판이다.
이건 분명 하숙생 탓이다. 자신의 물건을 아무 데나 두는 건 예사고 정리 안 하는 건 당연지사며 심지어 자신도 못 찾는 물건의 행방을 나한테 물어본다. 처음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물건 정리도 해주고 없어진 물건도 찾아주고 했는데 슬슬 아니 아주 많이 화가 치민다. 정리습관을 위해 모범을 보이는 게 좋다 해서 그렇게도 해봤다. 그런데 결국 계속 나만 하고 있었다. 벌금을 물렸으나 처음엔 좀 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뻔히 보이는 용돈이 벌금으로 다 나가게 생겼다. 이리 살면 안 된다 좋은 얼굴로 얘기도 해보고 잔소리도 하고 화도 내보고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름도 긴 '어지르고 내버려 두고 점점 쌓여 자기 물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병'은 현대의학의 힘으로도 고칠 방도가 없어 보인다. 습관 관련 자기 계발서의 유명한 저자들의 힘을 빌려도 최소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던 열네 살 하숙생은 도대체 뭘 알아서 하겠다는 것인가. 생각과 동시에 속은 벌써 뜨거워지고 있었고, 꼭꼭 숨겨 놓은 마그마는 조금씩 비집고 올라와 분출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저혈압인 내 혈압은 이미 정상 범위를 넘어 고혈압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주위가 조용하다. 마그마 뿜을 대상이 안 보인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한참 동안 인기척을 못 느꼈다. 분명 나간다는 말을 듣거나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터져 나오려 했던 마그마를 일시정지 시킨다. 띵했던 머리를 잠시 가라앉히고 숨을 들이마시고는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하숙생을 찾아본다. 예리한 나의 '촉'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소리 내면 결정적 증거를 놓칠 수도 있다. 아주 천천히, 소리 나지 않게,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뗀다. 다행히 방문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다. 벽에 붙어 거미처럼 옆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방문 사이로 침대 위에 얌전히 놓인 하숙생의 발이 보인다.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방 문가를 붙잡고 있는 힘을 다해 한쪽 옆구리를 구부려 방으로 목과 얼굴을 쭉 뺀다. 구부린 옆구리 쪽 다리에는 힘을 주고 반대쪽 다리는 옆으로 들어 올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나마 일주일에 두어 번 큰맘 먹고 했던 옆구리 스트레칭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아, 그런데 계속 유지하려니 너무 힘들다. 근력과 유연성이 절실한 순간이다. 하숙집 아줌마도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
놀랍게도 매년 심신은 허약해지는데 촉은 점점 발달한다. 아쉽게도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지, 어떤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촉이 발달해야 하는데 하숙생 관련 촉으로만 발달이 된다. 역시나 우리 집 하숙생은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휴일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정해 놓았으니 약속을 어긴 건 아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보던 스마트폰을 아직까지 보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안 그래도 스마트폰과 연애하는 꼴이 보기 싫은데, 분명히 학교와 학원 과제물이 많다 들었는데, 내가 집안일하는 동안 저 자세로 스마트폰과 같이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래 딱 걸렸다. 오늘도 올 것이 왔구나. 며칠 잠잠했었는데. 구부린 옆구리를 바로 세우며 심신을 가다듬고 멈춰 있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미 아까 난장판 된 거실에서 조용함을 감지한 순간부터 이런 사태를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방안으로 성큼 들어가 팔짱을 낀 채 하숙생을 노려보며 마그마를 분출한다. 숙제는 안 하고 계속 보고 있었냐부터 시작해서 방 좀 깨끗이 쓰고 거실에 있는 물건 다 가져가서 정리하라는 소리까지 쉬지 않고 쏘아댄다. 덧붙여 예전 일까지 끄집어낸다. 그리고 앞날 예견까지 한다. 신들린 듯이 쏘아 대며 목소리는 점점 커지는데도 이상하게 속은 안 시원하다. 점점 하려고 하는 말 대신 이성 잃은 하숙집 아줌마만 남았다는 느낌이 들 때쯤 활화산이 멈춘다.
갑자기 들이닥친 하숙집 아줌마의 공격에 하숙생은 당황한 듯했고, 포효하는 하숙집 아줌마에 잠시 망연자실했으나 중간중간 틈을 노려가며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여태껏 숙제하다가 모르는 게 있어서 검색했고, 유튜브에 도움 될 만한 정보가 있는지 찾아봤다고 한다. '아, 계속 본 건 아니었구나. 다행이군. 내가 많이 경솔했네.' 그러나 이 생각도 잠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좀 더 열심히 생각해 보고 이 책 저 책 찾아보려 하지 않고 스마트기기에 의존하는 모습과, 쉴 때는 대부분 스마트폰 여자 친구와 함께 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내가 백번 양보하고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하숙생의 신경질적이고 삐딱한 태도는 활화산에 다시 불을 붙였다. 다른 걸 보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다가 궁금해서 찾아본다는 정당한 사유로 스마트기기를 보는데 왜 괜한 트집을 잡냐며 조금밖에 보지 않았는데 너무 한다는 하숙생의 짜증 섞인 말과 태도는 내 경솔한 태도를 반성하고 훈훈한 대화로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침착하게 일단 좀 전의 상황을 오해하고 화부터 낸 것은 미안하다 말하며 바로 2라운드로 넘어간다.
2라운드. 안 그래도 요즘 자신이 불리할 때나 말하기 싫은데 질문을 받거나 대답을 요구하면, 눈은 그야말로 세모꼴로 변해 완전 어이상실 표정과 전보다 세진 억양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울분에 차서 말을 하는데,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모르겠다. 뭐가 그리 만날 억울한지 누가 보면 착하디 착한 콩쥐 데려다 노동력 착취와 학대하는 팥쥐엄마라도 된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더 억울하고 답답할 때가 많다. 제대로 삐딱선을 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삐딱선을 안 탄 것도 아닌 이상한 태도와 시선에 나도 같이 삐딱선을 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오늘처럼 이성을 잃고 작정한 날은 나도 삐딱선을 타고 신나게 달려간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다. 자신의 태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숙집 아줌마인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열변을 토하던 하숙생은 한참 전부터 입을 닫고 있다. 말해봤자 안 통한다는 거겠지.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진다. 그야말로 기진맥진이다. 자기 물건 가져가라는 얘기를 하려 했는데 2라운드까지 와버렸다. 목도 아프고 머리고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학생 마음대로 하라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방을 나와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어질러진 물건을 다시는 안 쓸 것처럼 여기저기로 던지며 청소를 시작한다.
다른 때 같으면 서로 언쟁을 했어도 나와서 주섬주섬 자기 물건을 챙겨 가던 하숙생도 오늘은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방에서 꼼짝을 안 한다. 시끄러운 청소기 소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맡기며 머리로는 하숙생 방에 들어가기 전으로 되돌아가 상황을 되돌아보며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당한 하숙집 아줌마의 횡포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항하다가 체념해 버린 하숙생의 입장까지도 생각해 본다.
맘먹고 공부하려는데 하다 보니 잘 안 되고 답답해서 힘들었겠지.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제 나름 검색도 하고 유튭도 찾아봤겠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설사 공부 안 하고 다른 걸 봤다 쳐도 쉬는 날 편하게 있고 싶을 텐데 뭐 그게 그리 죽고 살 일이라고 하숙생에게 쏘아댔나. 자기도 학교, 학원 안 가는 날 하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어질러진 집이야 치우면 되고. 내가 좀 도와달라고 큰소리로 부르면 마지못해 나오기는 해도 정리하고 도왔을 텐데... 결론은 어른인 내가 조금만 더 참았어야 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청소기 지나가는 곳이 뿌옇게 흐려진다. 눈을 깜빡거리며 겨우 청소를 끝내고 시계를 보니 점심이 훌쩍 지나 있다. 지금까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느라 에너지를 소진한 상태라 쉬고 싶었지만 배가 고플 하숙생이 마음에 걸렸다.
미안하기는 해도 별로 말 걸고 싶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연다. 청소할 때 슬쩍 보니 침대에 누워 있던 하숙생은 이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학생, 점심 뭐 먹을래?"
"라면이요."
"계란은?"
"하나요."
"조금만 기다려, 금방 해 줄게."
하숙생이 빨리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모드 전환이 참 빠르기도 하다. 아까 활활 불타오르던 하숙집 아줌마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다중인격자(다중이)였나 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냄비를 꺼내 라면 끓일 물을 받는다. 파와 계란도 꺼내 놓는다. 잘 익은 김장김치도 같이.
그래, 너나 나나 잘 먹어야 또 링에 올라가니 우리 잘 먹고 잘 살아 보자.
"학생, 라면 불어. 빨리 와서 먹어."
배가 많이 고팠는지 부리나케 와서 앉는다.
"어때?"
라면 좋아하는 하숙생은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며 말없이 엄지 척을 한다.
속 뒤집어 놓을 때는 언제고, 이렇게 또 내 기분을 풀어준다. 뒤끝이 없는 건지 아줌마의 존재를 공기처럼 가벼이 여기는 건지 한 시간 전의 상황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밥 주는 사람이라 그나마 존중해 주는 것인가. 라면 하나로 속상함과 나쁜 감정을 털어내는 하숙생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하숙생을 믿지 못하고 화부터 낸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어느새 반쯤 비워진 그릇에 라면을 더 담아준다. 그러고는 기어이 한마디를 더한다.
"학생, 그래도 우리 정리정돈은 좀 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네..."
진정성 있는 대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답을 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매우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래, 그거면 됐다.
하숙생이 나를 다중이로 만든 건지, 갱년기가 나를 다중이로 만든 건지, 아니면 내가 원래 다중이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앞으로 하숙생과 함께 할 긴 시간 동안 언제 어떻게 다중인격자로 변할지 모르는 그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 체력증진이 시급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2라운드를 치르는 동안 띄엄띄엄하는 스트레칭만으로는 계속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홈트를 시작해야겠다. 아니, 아침 명상부터 매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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