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는지 몰랐지만, 잃어버렸던 것
8일 차.
어젯밤 내내 잠을 잘 못 잤다. 자꾸 내 귀와 머리에 작은 곤충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연신 긁어댔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불을 켜 보니 매트리스 위로 개미들이 가득하다. 그렇게 밤새 잠을 설쳤다.
이른 아침이 되어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 했더니 지붕에서 쿵쿵 소리가 난다. 원숭이인가 나가봤더니 커다란 새 녀석들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그만 잠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갔다. 배가 고파 다우다의 가게를 기웃거렸다. 다우다의 가게에 아침을 만들만한 재료가 없다. 아침 재료를 살 겸 다우다와 동네 산책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나왔는데도 동네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가게 주인들이 여유롭게 사는 것 같아 좋은데, 다우다는 “10시가 넘었는데도 장사를 안 한다”며 투덜댄다. 그 덕에 우리는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다우다: 너 여기에 얼마나 머물러?
나: 2주 더 머물 거야
다우다: 여기 어때? 더 있고 싶어?
나: 응! 나는 여기 오래오래 있고 싶은데 돈이 문제지 뭐
다우다: 마나스! 돈은 문제가 아니야. 인간성, humanity가 문제지. 네가 머물고 싶으면 돈과 상관없이 여기에 얼마든지 머물 수 있어
나: 정말? 고마워. 근데 마나스가 무슨 뜻이야? 만딩카어야?
다우다: 응. humanity!
그날 이후에도 이 단어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humanity, 이곳에 온 후로 참 많이 들은 단어다. 나의 코라 선생님은 틈만 나면 내게 인간성 humanity에 대해 말한다.
Humanity인간성이 제일 중요해!
여기에 Humanity마저 사라지면, 뭐가 남겠어?
그는 공연을 위해 유럽에 정기적으로 가곤 하는데, 유럽에 가면 이상한 병에 걸린다 했다. 방에 들어가서 3일 내내 티비만 보고, 나오지 않게 되는 병이라 한다.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왜 한국에서 고통받았는지 이해하게 됐다.
잃어버렸는지 몰랐지만, 잃어버렸던 것
내 집은 전라도에 있지만, 올해(2024) 10개월 동안 서울에 살았다. 나는 서아프리카 만데 mande 춤과 만데 음악 타악기인 둔둔dundun을 배우기 위해 실업급여를 끌어모아 서울로 유학을 갔다. 좋아하는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고 기뻤지만, 동시에 고립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2023년 서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인 코트디부아르에 갔을 때 춤과 음악이 사람들의 삶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음악과 춤은 특별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특별한 순간을 위한 것임을, 누구에게나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선물이라 느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서울의 구조속에선, 음악과 춤이 삶과 철저히 분리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거리에서 연주를 하면 소음이 되고, 춤을 추면 민폐가 된다. 돈으로 시공간을 사야 자유롭게 춤을 추고 연주할 수 있는 도시에서, 돈이 없는 내가 어떻게 음악/춤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을지 막막했다.
첫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음에도, 나는 이번 유학(?) 기간 동안 서울에서 지내며 참을 수 없는 때가 되면 펑펑 울었다. 눈물이 한번 터지면 멈춰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번 울고 나면 일주일 동안 내 안에 아무런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종일 집에 누워만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애인이 뭐가 문제인지 진상 규명을 하려 했던 때가 생각이 난다. 그때마다 아무리 설명해도, 내 말은 그의 마음에 미끄러지는듯 했다. 내 몸이, 내 삶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때의 나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그 눈물은 내 인생을 통튼 거대한 상실을 의미했다. 누구도 앗아간 적이 없지만, 실로 빼앗긴 것이다.
그건 인간성, Humanity였다.
난 Humanity가 필요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바란게 아닌데, 서울에선 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작년(2023)에 10개월 간의 아프리카 종주를 마치고 서울의 친구 집으로 가는데 지하철 안의 공기가 살벌하게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넘치는 억울함, 분노, 불안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서울에서 자전거로 배달 알바를 하며 골목골목을 다니면서도, 사람들이 유리벽 너머처럼 느껴졌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 바로 옆에 있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다들 자기 갈길을 갔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걸까?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서울에 사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내 영혼도 점점 변해갔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바쁘고 여유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생기고 사소한 일에 화가 났다.
감비아에 온 지 3일째 되던 날 나는 정체성의 혼란이 왔다. 내가 살아온 본래의 삶을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아니 보다 한국에서의 삶을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여기엔 있는데 한국엔 없네', 이런 식으로 한국과 이곳의 삶을 비교하며 한국의 삶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곳에선 서울에서 겪었던 증상과 고통들이 마치 오래된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없다. 아니, 이건 어쩌면 내 인생 통틀어서 고통받았던 일들에 대한 이슈다. 어릴 때부터 느꼈던 고립감, 외로움, 심리 상담을 받고 정신과 약을 먹으며 고통받아왔던 일들이 어느새 이곳에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이곳에 도착한 첫날 켐부제로 가는 길에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힘들게 왔지만 여기라고 특별한 게 아니다. 똑같은 삶이고 오히려 더 힘든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차이 일까.
적어도 이 집안의 사람들은 나를 돈이나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 이용하는 등으)로 대하지 않고 그냥 한 생명으로 존중하며 대한다 느낀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서도 아니고, 나를 특별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 보편적이고 일상적으로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마음의 힘과 여유가 있다 느낀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만 갇혀있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에 열려있는 게 느껴진다. 하던 일이 있더라도, 앞에 생명이 다가오면 모든 것을 멈추고 그 생명을 바라본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잠깐이라도, 바쁜 와중에라도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마음 씀이 느껴진다. 거창한 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차이 하나가 삶의 뿌리를, 근본을 바꾸는 것 같다.
내 생각에 humanity는 대단한 게 아니다. 그냥 아주 짧게라도 눈앞의 존재를 마주 보는 거다.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다. 내 앞에 있는 존재의 안위를 궁금해하고 간단하게만이라도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민폐가 되는 사회에서, 누군가의 안위를 궁금해하는 건 '사이비 종교’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만났던 친구가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오랜 외국 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길을 걷다가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는데 "그 사람이 정말 이상하게 쳐다봤어"라고 말했다. 길 가던 사람에게 인사를 하다니! 그건 다른 나라에서나 통하는 일이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이상하게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근데 그게 정말 이상한 일인 걸까.
한국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부르키나파소 친구가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 어린이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었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린이와 함께 있던 보호자가 어린이를 혼냈다고 했다. 낯선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잘못된 거라고 훈육을 하는 보호자에게 그는 "괜찮다"라고 말했다 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 만나면 '이 사람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살펴) 봐야 해. 그래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있어요. 그래서 몸이 이렇게 (움츠러들고 경직되는 모양을 하며 고양이처럼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눈동자).
부르키나파소에서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눠요.
그래서 어디를 가도 내가 킬리키바(하늘과 땅 사방으로 펼쳐지는 커다란 옷)가 되는 것 같아요. 밖에 나가면 내가 계속 (기쁘고 신난 표정으로) "와아~!, 와아~!"
우리는 누구든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인생 조언을 구할 수 있어요
나는 서아프리카 만데 음악과 춤을 통해 이들의 문화를 배우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시작일 수 있다고 느꼈다. 이곳의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한 인간이 살아가는 전인적 과정을 가족과 이웃,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봐 주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 삶에서 그걸 원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부르키나파소 친구의 말처럼, 한국에서는 나와 상관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다르게 대한다. 하지만 인간이, 나아가 한 생명이 살아가는 과정에 ‘상관없는’ 대상이 있기는 한 걸까?
단절된 세계는 편리하고 때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할 수 있지만 결국 내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우주는 절대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다. 본디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서로를 위해 죽고, 산다. 보이지 않는 많은 곳에서 서로 돕고 기대며 살고 있다. 서로 '민폐'를 끼치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당연한 꼴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백인 제국주의와 자본이 모든 것이 홀로 가능하다는 거짓 신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누구도 만능할 수 없고 완벽하지 않고 그러니 혼자 살 수 없다. 그래서 서로 감안하고 함께 살아가는 거다. 함께 산다는 것은 내 앞의 생명을 그대로 마주 보는 것이다. 나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가늠해 보는 것이다.
나는 사는 동안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법칙을 따르고 싶다. 내가 다른 연결된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고 싶다. 설사 내가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 죽을 운명이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고 죽는다면, 난 그것만으로 내 삶에 만족한다. 두려우면 잠시 쉬어도 괜찮다. 잠시 쉬더라도 다시 그 연결 속으로 돌아와 살고 싶다. 아주 사소한 연결이라도..
모든 관계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내 앞의 모든 존재는 나와 깊이 연결된 존재들이다. 나는 나의 삶과 운명이 나를 살고, 또 죽게 하기 위해 서아프리카까지 오게 했다 믿는다. 이 땅의 정령과 신들이 내게 사는 동안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지구에서 맺으라고 선물을 준거라 믿는다.
인간성이 제일 중요해
humanity is most important!!!!
돈은 너를 지켜주지 않아
money will not save you.
삶은 그런 게 아니야
life is not like that!!!
인간성이 너를 구해줄 것이다
humanity will save you
나의 코라 스승, 산잘리 조바르떼의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오늘 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