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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Aug 23. 2024

‘돈’이라는 강요된 욕망

패러다임 해체 ① 세상에 안정 수입이란 없다


패러다임 해체


패러다임 [명사] 어떤 한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 체계 — 표준국어대사전


그런데 왜 나는 퇴사를 하자고 마음먹어 놓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가?


이것 또한 지금 시점에서는 치열한 자기 해체의 단계일 듯하다. 나는 작년 여름 출근길 구토쇼를 계기로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안위를 위해 이상을 포기하고 ‘가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자각했다. 그리고 약 2개월간 구체적인 퇴사 날짜와 이후 계획을 짰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결국은 세상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역시 달콤한 ‘안정 수입’을 내버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 다시 업계로 돌아올 것을 대비해 조금 더 경력을 쌓아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망설임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족을 만들고 싶은데, 그러려면 결혼을 해야 하고, 요즘 시대에 직장으로 대표되는 안정 수입이 없는 사람은 매력적인 배우자상이 아니라는 판단에 불안하기도 했다. 또한 직장 상사가 새벽까지 면담을 진행하며 나를 설득한 것도 망설임의 큰 요소였다.


당시 나에게는 내가 느끼는 이런 여러 불안감에 일일이 대응할 만한 용기가 부족했다.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완벽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도대체 내 계좌에 얼마가 있어야 안심할 수 있는지. 혼자 해보다가 잘 안 되면 다시 돌아오면 되지, 그런데 그 기간이 정확히 어느 정도여야 재취업을 할 때 불리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들.


사실은 그런 갖가지 불안마저 공고한 패러다임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겁먹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괴롭지만 어쨌거나 달콤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지키고 싶다는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


‘안정 수입’, 인생의 보험이 되어주는 커리어를 포기하지 못하는 불안한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새롭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내 의견에 동조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절 없다.


내 글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지, 멀쩡하게 사회생활 잘하고 있는 모든 인생을 ‘가짜 인생’ 취급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막연한 불안감에 한번 포기하고 키를 돌렸던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막연한 불안감에 패배한 채 퇴사 선언을 고사하고 다시 회사로 발걸음을 돌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내 문장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내가 나의 이상으로 향하는 길을 머뭇거리게 했던 불안 요소들을 어떻게 깨뜨렸는지, 내가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을 어떤 방법들로 깨뜨렸는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돈’이라는 강요된 욕망


자아 실현을 도와주지 않는 의무적 괴로움을 벗어날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에 혁명적인 변화를 주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진정 원하는 삶을 사는 것, 나의 영혼을 살리는 ‘영혼 살림’을 위해서는 지금껏 우리가 옳다고 믿고 살았던 획일화된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진행했던 일은 ‘안정 수입’이라는 기댈 구석에 의존하는 마음을 벗어나는 것, 정확히는 ‘돈’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다.


가짜 인생을 살고 있다고 깨닫고도 괴로움을 포기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이유는 순전히 돈이었다. 돈, 돈, 돈. 내 사주에는 ‘정재’가 많은데, 이는 안정적인 재물과 인색함을 상징한다. 비단 정재를 품고 태어나서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 가난하고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도 있고, 언제 아플지 모르는 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있고, 언젠가 책임져야 할 장애를 가진 형제가 있기 때문도 있고, 월세를 내지 않으면 진짜로 홈리스가 될 것이기 때문도 있겠지. 모든 것이 안정 수입이라는 달콤함을 포기하지 못할 이유가 되었다.


그러던 중 불현듯 떠오른 의문은 날 괴롭게 했다. 내일 죽는다고 했을 때 과연 벌지 못한 ‘안정 수입’이 생각날까, 이루지 못한 꿈과 자유가 생각날까? 내일 죽는다고 했을 때 말이다. 이 의문을 떠올린 날 나는 돈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꿔야 함을 직감했다.


‘안정 수입’이라는 단어는 의도치 않게 위기감과 불안감을 조성하여, 마치 안정된 수입이 아닌 모든 수입을 ‘불안정’하게 취급하는 듯하다. 그래서 불안정 수입이란 안정 수입과는 달리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돈이며, 심지어는 안정 수입보다 가치가 하락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화폐라는 숫자의 가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가장 큰 함정은 우리가 안정 수입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를테면 대표적으로 월급이라는 요소 역시 엄밀히는 ‘안정’ 수입이 아니다. 우리가 권고사직을 벌벌 떨며 무서워하는 것도 그래서이지 않은가? 월급 또한 본질적으로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정’ 수입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영원불멸한 ‘안정 수입’이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정 수입은 필수’라는 강요된 라이프스타일 역시 패러다임이다. 단어 자체를 깨야 한다.


퇴사를 결심한 나는 인건비를 줄이려는 회사가 권고사직 칼부림을 시작할 때도 전혀 타격이 없었다. 난 이미 월급을 포기할 각오를 한 상태이며, 불안정 수입으로도 생존할 수 있도록 소비 습관과 마인드를 조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안정 수입이란 내 인생에 없다고 치부한 것만으로도 회사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마치 족쇄에서 해방된 것처럼.


우리는 직장이 없고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원할 때 언제든 돈을 벌 수 있다. 몸을 이용하든 머리를 이용하든, 굶어 죽을 상황이 닥치면 그 일이 어떤 일이든 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정기적이지 않을 뿐. 그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를 위한 2,400시간


설레지 않은 일을 통해 얻은 수입이란 내 시간을 판 대가를 받은 것이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즉 나의 시간과 맞바꾼 돈이라는 뜻. 예컨대 노동을 통한 수입과 노동에 소요된 시간은 정확히 그 가치가 동일하다. 그 시간을 사용한 방식의 질이 얼마나 좋고 나쁜지를 떠나서 말이다.


하루 중 회사로 인해 사용되는 모든 시간을 대략 10시간이라고 잡는다면 1년으로 계산했을 때 2,400시간이 나온다. 1년이라고 하면 짧아 보이지만 2,400시간이라고 하면 왜인지 굉장한 숫자 같다. 1년간의 ‘안정 수입’은 결국 약 2,400시간과 그 가치가 동일하다.


전 세계적으로 미니멀리즘 붐을 일으킨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말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내 일상을 이루는 시간이 설레지 않으면… 한번 버려보는 건 어떨까? 물건을 정리해 새 공간을 얻듯이, 오직 나만을 위한 2,400시간이라는 시간을 얻어 나에게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


그 시간을 재분배하여 나의 영혼을 살리고 이상을 향하며 재능을 갈고닦는 데 투자한다면? 즉 현재의 달달한 안정 수입을 포기하는 길은 전혀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안정 수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사는 것은 주객전도다. 스스로 확보한 2,400시간으로 새로운 일상을 보내 봤더니, 사실 안정 수입이란 필요치 않더라는 흐름이 옳다.



만족감의 정확한 역치를 파악하라


『간소한 삶 가이드the Simple Living Guide』라는 인기 디컨슈머 안내서를 쓴 루어스는 자발적 간소함의 관건이 자기 자신과 자기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라 말했다. “제가 보기에 사람들 대부분은 삶을 의식적으로 살아가지 않아요. 깊이 생각하며 살지 않죠.” 루어스가 말했다. “저는 그렇게 살아요.” 예를 들어 그는 늘 소비자로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을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소한 자기 이해로 쇼핑 중단은 희생이 아닌 선물이 된다.

… 그는 성인이 된 후 언제나 주변 사람들이 소득이 줄어들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좋아하지도 않는 커리어를 추구하거나 싫어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삶이 공허하고 엉망진창이라고 말해요. 다른 일을 하는 건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죠.”

…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은 물질주의보다 심리적 욕구를 더욱 잘 충족시키기 때문에, 보통 간소한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와 텔레비전, 음반 소비를 줄이면서까지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간을 늘린다. 소비를 멈춘 세상은 정말로 더 차분한 세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빠른 속도와 삶이 필수처럼 느껴지듯이, 느린 속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간소한 삶이 자기 목소리를 더욱 명확하게 듣는 것이라면, 실제로 풍성한 고요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루어스의 말마따나, “일단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저 연못에서 개구리 소리를 듣는 것임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 J. B. 매키넌,  『디컨슈머』


세상에는 한 달에 100만 원만 있어도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도 있고, 500만 원이 있어도 부족한 사람이 있다. 중요한 건 ‘나’는 얼마 정도가 있어야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관련해 대화해 본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만족 역치를 잘 모르고 있음을 파악했다. 나의 씀씀이와 소비 수준을 고려했을 때 나는 이 정도가 있으면 충분히 만족해, 가 아니라 통상적으로 사회에서 말하는 행복 수치를 이루려면 한 달에 몇백 정도는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실, 체감상 10명 중 9명은 “돈은 그냥 많을수록 무조건 좋다”고 대답한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어서 어디에 쓰고 싶냐고 하면 그냥 집 사고 차 사고 맛있는 거 먹겠다고 하지 어떠한 이상을 이루겠다거나, 나누겠다거나, 꿈을 위해 투자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내 생각에 이 경우에도 오지선다 시험지처럼 정해진 답이 자동으로 도출된 것 같다. 패러다임이다.


한국에는 고유의 종교가 없다고 하지만… 정말일까? ‘돈교’. 대다수 국민은 물질주의로부터 비롯된 돈교를 추종한다. 돈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어려서부터 돈을 얻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 같다. 다분히 종교적이다.


우리는 더 많은 물질 소비를 위해 더 많은 자본을 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방향이 양적 팽창이라는 일방향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선별된 효율적 소비를 위한 최소한의 자본만 필요하다는 대답을 듣기는 이토록 어려울까?


더 이상 양적 팽창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도처에 널린 우울증 환자와 바닥을 모르고 꺼져 가는 출산율, 높은 성적만이 유일한 목표가 된 대치동 청소년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이제는 양적 팽창이 아닌 질적 팽창, 즉 심리적인 내실을 다지는 사회 분위기가 너무나 절실한 시대가 되지 않았나.


사람들은 구체적인 꿈과 목표가 있어서 만족감의 역치를 높게 설정한 것이 아니다. 나의 구체적인 꿈, 그리고 나 자신이 어떻게 하면 가장 최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그 기준을 모르기 때문에 막연히 사회 통념에 맞춰 역치를 설정한 것이다. 그 기본적인 삶의 자세조차 곰곰이 성찰해 볼 기회를 박탈당한 채 우리는 성장한다.


한 달에 세금 떼고 80만 원 벌다가 이제는 300, 400은 쉽게 벌어들이는 사람이 됐지만,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얼마가 있어야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80만 원 벌면서 살았던 때보다 지금 더 살이 쪘고 게으르며 몸에 안 좋은 것만 먹는다. 시간 아깝다며 잘 걷지도 않고,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고, 모종의 결핍 때문에 입지도 않는 옷을 한 무더기 사서 다 버린다. 200만 원 벌 때나 400만 원 벌 때나 모으는 돈의 액수는 거의 같다.


회사 다니느라 피곤해서 어지간한 건 다 돈으로 해결하고 싶어하는… 뭐랄까. 변별력과 생활력이 떨어진 사람이 됐다. 그리고 이런 삶의 방식에 다소 염증을 느낀다. 돈 없으면 무기력해지는 자본주의의 노예면 노예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림’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우리는 타고난 나만의 ‘행복 역치’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100부터 시작해서 줄여 가는 것보다 0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려 가보는 게 훨씬 효율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기 싫은 일 하고 집에 돌아왔으니 지금부터 스트레스 해소용 소비 시작!’ 이렇게는 전혀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난 가장 먼저 짐 정리를 시작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방을 뺄 수 있을 만큼 물건을 비워봤다. 그리고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기 전에 멈추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나는 많은 양의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고, 많은 양의 음식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내가 필요 이상의 무언가를 원할 땐 기분이 나쁜 일이 있었거나 유난히 힘든 날이었다.


특히나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옷에 대해서는, 내 체형과 골격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스타일링을 했다기보단 그냥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건 다 사 들이는 무분별한 소비를 해 왔음이 명명백백 드러났다. 드레스 룸을 비우고, 옷을 나누거나 파는 과정에서 내가 정말로 비효율적인 옷질을 했다는 사실을 무참히 깨닫고 말았다.


나는 내가 ‘어떻게’ ‘얼마나’ 소비해야 만족하는 사람인지를 조금도 알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왔구나. 조금의 물건과 조금의 음식, 내 몸에 잘 맞는 몇 벌의 옷으로도 나는 이토록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를 깨닫고 난 뒤 나의 소비 습관이 교정되기 시작했다. 아니, 아예 ‘소비’라는 행위 자체를 근원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돼버렸다.


영혼 살림 및 ‘돈’에 대한 정확한 필요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렇듯 나만의 만족 역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확히 어느 정도의 화폐가 필요한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맞춘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고,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종교처럼 돈을 추구하지 않고, 좀 더 분별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제 나는 본질을 추구하는 삶, 즉 ‘코어주의corism’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없이 살아도 괜찮다고 결정한 물건들”을 늘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 없이도 살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립지조차 않은지를” 알아가며, 정확히 나의 ‘필요’와 만족 역치에 맞는 소비만을 하도록 말이다. 그런 것도, 꽤 괜찮은 삶의 방식이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괴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이미 환자다


혹자는 본인이나 가족이 갑자기 아플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돌봄’에 대한 의식이 턱없이 부족한, 돌봄 자체를 개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안감에 잠식되는 것을 진정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돌봄 영역에도 패러다임이 개입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엔, 괴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지금도 이미 환자다.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건강히 가꿀 생각을 해야지, 계속 아픈 상태로 버티면서 미래의 치료비를 벌어두려고 한다. 현재를 충실히 사는 행동도 아니거니와 스스로를 존중하는 느낌도 아니다.


한편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희생할 순 있지만, 한 가족 구성원의 삶과 행복을 ‘일방적으로’ 희생하며 노후를 대비하려는 가족이 과연 ‘가족’이라 불릴 자격이 있나? 말하고자 하는 건, 단순히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 속 구성원의 ‘마음’이다.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인지, 착취하려는 마음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결코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무엇도 나 자신의 행복과 건강보다 우선할 수 없다. 나의 존엄과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보살펴 줄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라는 것. 부디 나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후순위로 미루지 말자. 내가 날 돌보지 않으면 누가 날 돌봐줄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나’를 돌보는 방향으로 한 발걸음 내디뎌야 한다.


인생 유지비는 어차피 벌어야 하고, 비상금도 어차피 쌓아 둬야 한다. 기왕이면 마음을 함께 챙기며 몸을 챙겨 보는 건 어떨까. 이미 아픈 상태에서, 괴로운 상태에서 혹은 맹목적으로 희생하며 돈을 버는 것과 진정 나의 이상을 이루며, 행복을 추구하며 돈을 버는 것. 과연 어느 쪽이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더 클까.



‘나이’는 메리트일 수도 있다


한국은 확실히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이 정도는 해야 해, 하는 편견과 통념이 만연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종 우리를 괴롭게 하는 통념을 맞닥뜨리고 문제의식을 느껴도 “어쩔 수 없어. 이 나라 문화는 원래 그래.”라는 식으로 말하며 무기력해한다. 그러나 무기력해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한 직장 동료는 서른다섯 이후로 자기계발 의욕이 꺾였다고 말했다. 무슨 일을 해도 재미없고, 뭘 봐도 흥미롭지 않다고. 이 의욕이 꺾이지 않는 사람이 참 대단하다고. ‘자기계발’ 자체에 패러다임이 묻었음은 차치하고(자기계발이라는 용어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도태되지 않는다는 한국식 경쟁 마인드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왜 나이가 들수록 열정을 잃는 사람과 나이가 들어도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애초에 맞는 옷을 입고 맞는 직업을 가지기 위한 다양화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꿈과 이상을 사유하지 못하도록 커왔는데 무엇 때문에 성장하려 하겠는가.


나이가 많아서 도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팽배하다. ‘이 정도 나이에는 이 정도는 이뤘어야 해’식의 범사회적 가스라이팅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덕분에 오히려 젊은 사람보다 더 경험이 많아서 프리랜서나 다른 파이프라인을 개척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고 본다.


만약 나이에 비해 갈고닦은 경험이나 능력이 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커리어를 벗어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누구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잘 생각해 보면,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으로 새 활로를 개척할 가능성이 아주 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회사를 은퇴하고 제2의 인생을 궁리해야 하는 시점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대신 해 주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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