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부터 파란색을 좋아했다. 왜 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넌 가장 좋아하는 색이 뭐야? 라는 질문에 답할 색깔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겠다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파랑을 떠올렸다. 당시의 나는 수업시간에 하라는 공부는 안한 채, 창밖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학생이었고, 그 청량한 색이 주는 안정감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삶의 대부분을 파랑으로 물들일 정도로 광적인 애정까지는 아니었기에 그냥 일반적이게 파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오던 중 최근 팔로우 해둔 집 근처 미술실에서 파란 색에 대한 강의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것을 찾아 들을 정도로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홀린듯 이 프로그램을 신청하게 되었다. 말라버린 무채색과 같이 건조하고 황량해진 일상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혹은 어릴 적 위로받던 그 청량함에 대한 향수였을까? 알수는 없지만, 신청하고 일정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조금 촉촉한 기대가 있었다.
파랑을 떠올리면 그리고 싶은 몇몇 주제들이 있었다. 바다 혹은 우주. 바다와 우주는 닮아있다. 아직 인간의 집단 지성이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것들로 가득하다보니, 때로는 모험의 공간이기도 하고, 때로는 공포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짙은 파랑 속에서 밝음은 더욱 강조되고 소중하다. 깊고 어두운 파랑이 빛을 맞이하여 서서히 명도를 높여갈때 그 색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안도와 안정이 깃든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하며 나는 빛을 추구하는 바다 혹은 우주를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있던 날, 회사에서 나의 커리어 상황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변화를 접하며 급격히 휘저어진 심리 상태는 본래 그리고자 한 아이디어 역시 격하게 추상화시켰다.
미지의 삶을 걸어가는 길은 썩 순탄할 리 없다. 그 길 위에는 온갖 다채로운 이벤트들이 있을 것이고, 대부분은 많은 고민들을 전제한 선택분기들일 것이다. 묵묵히 걸어가며 충실히 내 앞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감내해내야 할 것이고, 정직하게 사유해야 하는 것 외엔 딱히 요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밝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정말 긍정적 미래일지 아니면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신기루와 같은 미래일지 알수는 없지만, 결국 신기루의 상은 이 근방 어딘가엔 오아시스가 있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담담함 외에는 도리가 없다.
그림을 그리는 모든 과정의 사유와 붓이 캔버스를 어루만지는 고요한 소리, 물감 향기, 그리고 미술실에 붙어 있던 메모지의 글귀들까지. 그리고 사방에 만연한 다채로운 채도와 명도의 파랑들. 이 모든 아우라는 격동하는 나를 품어주어 안정시켜주었다. 아크릴 물감을 써본 적은 없어서 결과물이 아주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때의 아우라가 물화되어 그 잔향을 풍기는 듯하여, 집안 잘보이는 곳에 두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