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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우 Jun 01. 2024

죽음에 관하여

죽음, 삶의 거울상

 『죽음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었다. 예전에 웹툰으로도 모두 보았는데,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의 책으로 선정하여 다시 읽게 되었다. 독서모임의 이번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을 주제로 담은 데에는 그 소재가 가진 의미와 이야깃거리들 때문이다. 죽음은 많은 콘텐츠들의 뮤즈가 된다. 이 주제가 가진 영원한 무지와 공포는 상상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하잘 것 없이 만드는 평등함은 대중들에게 공감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다루는 콘텐츠들은 각자의 수없이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가설을 내어 놓는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세계관이 호출되기도 하고, 자신만의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콘텐츠들의 가장 역설적인 공통점은 결국 살아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거울과 같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삶을 비추어내고, 산자에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죽음에 관하여』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품은 죽음을 계기로 사회를 구성하는 당연한 전제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도외시되고, 하찮게 여겨지는 가치들을 조명한다. 개 중 인상깊었던 몇몇 개념을 꼽아보자면,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과 존중, 삶에 대한 가능성, 타인을 향한 사랑이 있다. 작품은 이 진부한 가치들을 생사의 순간에 비추어 강렬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특히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과 존중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강력한 주장이다. 작중 신은 가해한 이에게 피해받은 이의 입장을 재연하여 느끼게 함으로 진정으로 그가 죄를 직면하고 절감하게끔 만든다. 또는 나의 삶을 스스로의 의지로 마감한 이들에게 남겨진 이들이 느끼는 고통을 느끼게 하여 자살에 대한 비판의식을 내보이기도 한다. 이 가치가 이토록 인간에게 중요한 원인은 그것이 인간이 가진 중요한 생존 전략이면서, 인간 혹은 사회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미시적으로 볼 때 개개인이 다른 존재이지만 거시적으로는 동질적인 개체이다. 이 가운데 어떠한 사건은 타인에게 발생할 지라도, 확률적으로 나에게 발생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발생한 고통일지라도 나의 것인 양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이를 공감이라는 능력으로 승화시켰고, 이를 통해 위험들을 보다 간절하게 동기부여하여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서는 타인을 나와 근본적으로 동일시하면서 내가 받기를 바라는 수준의 존중을 타인에게 제공하게 된다. 이는 마치 홉스 사회계약론의 제2자연법(타인에게 내가 받고 싶은 수준의 권리를 부여하라)과도 유사하다.


 한편 삶은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자수성가한 이들의 많은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듯, 어떠한 계기와 의지로 하여금 살아가는 국면은 상당히 바뀔 수 있다. 인간은 개개인이 가진 그 모든 가능성들을 최대한 살려 세상을 생존하는 전략을 가져왔다. 현재의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일단 함께 살아있다면, 더 나아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사회적인, 집단적인, 종species적인 차원의 생존의 이야기와 별개로, 그 안에서 개개인이 느끼는 고독감과 격리감에 대항할 가치는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타인과의 연결 및 합일의 느낌을 제공하고, 그 즐거움은 살아가는 가장 강렬한 수준의 동기부여와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이 작품에서 강조하는 가치들은 어쩌면 인간이란 종의 생존 전략과 밀접히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의 전략과 개별자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어찌되었건 개개인은 개개인으로 존재하고, 당장에야 이 집단의 구성원리를 따르는 것이 생존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대체로 따르겠지만, 이 원리에 대한 강한 구속력이 되는 근본이 없다면 항상 체계는 위태로울 것이다. 인간의 존재를 생각했을 때, 현대까지 축적된 합리성의 개념으로는 영혼이나 사후 세계와 같은 것들을 증명할 수는 없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일단 배제한다면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지고 화학 작용하는 하나의 고도화된 기계에 불과하다. 기계는 태초로 존재함 자체로 완성이고, 거기에 의무나 권리의 개념은 없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종의 생존을 나아가 자신의 생존의 체계를 만들기 위해 위와 같은 가치들을 정립했을 것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구성원들에게 설득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사후세계의 개념 및 심판과 같은 요소를 상상력으로 채워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현대에도 끊임없이 『죽음에 관하여』와 같은 콘텐츠들로 재생산된다. 이 모든 인간의 근본이 아무것도 없음이라면 상당히 허무하기는 하다. 다행히도, 관측되지 않고, 증명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가능성을 가지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게 되었음에도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나름의 의미들을 설정하여 나아가는 것은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치 엔딩크레딧이 정해진 게임을 플레이 할지라도, 그 플레이하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이 의미를 가지듯. 그런 길의 끝에 생물학적 육체의 종말이 도래한 시점, 어쩌면 그간 관측하지 못했던 신을 대면하여 칭찬받아도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은 삶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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