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공간
해가 바뀔 즈음, 3~4년 가까이 써온 에어팟이 결국에는 그 감가상각을 거진 다 하여, 20분 남짓의 출근길조차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오른쪽과 왼쪽 유닛이 서로 매일 번갈아가며 온 힘을 짜내어 주인의 감성을 끌어올릴 음악들을 재생해 내는 그 안쓰러움에, 결국에는 새 에어팟을 구매하여, 지나간 세월을 버텨온 전자기기에게 안식을 주었다. 최신형 에어팟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컴퓨터인 양 작은 칩셋을 가지고, 노이즈캔슬링이라는 놀라운 기능을 제공했다. 이 최신 기술은 에어팟이 주변의 소리를 먼저 듣고, 순간적으로 파장을 분석하여, 마치 일 잘하는 성실한 직장인이 긴급상황에서 업무처리를 하는 것 마냥 신속하게 상쇄시키는 파장을 내뿜어 제거하고, 에어팟이 내는 소리만을 사용자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작용한다.
에어팟 유닛을 꼭 눌러 노이즈캔슬링을 활성화하면, 마치 한 층의 소리가 뿌옅게 되는 것처럼 이질적인 고요함이 펼쳐진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는지 깨닫게 된다. 동시에, 내가 원하는, 혹은 내가 선택한 소리만이 들린다. 이로 인해 비로소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도 선명하게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게 된다. 이 노이즈캔슬링을 활성화하는 순간부터, 온전하게 나는 스마트폰의 세상과 공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리는 공간을 디자인한다. 으레 공포영화의 배경으로 쓰이는 음습하고, 불안정한 오디오를 경쾌함으로 바꾸면 영화 속 공간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한마디의 말이 조심스러운 고요한 카페 공간에 가벼운 음악을 틀어두면 대화가 유통되는 활기찬 공간이 된다. 노이즈캔슬링은 현재 사용자가 있는 실질적 공간을 사용자만이 홀로 있는 공간으로 재편해 준다. 일상의 우연한 상호작용들이 보통 촉, 후, 시, 청 네가지의 감각들로 이루어진다. 이 중 주변에서의 의도적인 교류 신청은 보통 청각적인 신호로 이루어지고, 촉각은 사회적인 거리를 침범한 비상상황이나, 무례함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시각은 스마트폰에 고정되고, 청각은 노이즈캔슬링하는 이 상황은 주변과의 사실상 단절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즉, 이 엄지만 한 에어팟이 공용공간에서 사적공간을 디자인해내는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사적공간은 온전한 고독을 위한 공간이 되진 않는다. 스마트폰은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여, 가상의 공간을 한뼘만 한 화면을 통해 펼친다. 그 안에서 우린 배회하다가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제공해주는 상호작용들에 노출되게 되고, 현실의 의도하지 않은 상호작용을 단절하고, 가상이지만 얕은 수준으로 의도한 공간에 안착한다.
새로운 기술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때마다 으레 나오는 우려들처럼, 이러한 공용 공간에서 상호작용의 의도적 단절이 인간미를 제거하고, 공동체를 와해시킨다는 류의 비판에 동의할 생각을 딱히 없다. 언제나 인간의 본성은 익숙하고, 안전한 공간을 희망해왔고, 보통 의도하지 않은 상호작용은 잠재적인 위협적 요소로 인식하여 긴장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든 무작위적이고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서 새로움이 창출되기 때문에, 이러한 더 높아진 의도성의 공간들이 대세적으로 펼쳐지고, 또 더 고도의 기술로 정착하게 된다면, 점차 세상이 단조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비관적 예상은 해볼 수 있다.
어느 플랫폼이나 서비스도 가장 즐거울 때는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무질서함이 어느정도 있는 상태이다. 이용자가 포화가 되고, 알고리즘이 정교화될수록, 역설적으로 변수는 사라지고 타성만이 공간을 황혼을 향해 치닫게 한다. 특이점이라는 표현에 어울릴 만큼, 사람의 마음을 에어팟이 노이즈를 찾아 캔슬링하는 시간차만큼이나 신속하게 파악하고 대응하는 기술의 시대에 인간이 추구해오던 질서와 안정의 완벽에 수렴한 삶은 재미있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물론 그때의 시점에는 또다른 혼돈을 불러오기 위한 창조적 파괴들이 추진되겠지만, 그 알 수 없는 미래가 디스토피아적일지, 유토피아적일지에 대한 고민들이 명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