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추상적인 스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알고 봐도 감동적이지만, 참고하시길.
늦은 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앞에는 어린이집과 놀이터가 있다. 그 놀이터는 시종일관 아이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곳이다. 특히 여름에는 그 활기가 절정이 달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밤중, 그리고 이 계절이라는 시간은 황량하고 쓸쓸하다. 놀이터에 드리워져 그늘을 만들던 푸른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살포시 덮여, 길가의 가로등 빛이 닿는 곳은 어둑하면서도 누르스름한 빛을 띈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 그런 계절이다.
이런 시기가 도래하면 사람간의 사랑이 만들어내는 치유를 노래한 한 드라마가 매년 떠오른다. 촬영지가 근처라서 비슷한 분위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시간적, 계절적인 배경이 지금 펼쳐진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강조하기에 참 좋은 캔버스가 아닐 수 없다. 춥고 어두운 곳에서 밝고 따뜻한 것은 주목할 수밖에 없다.
편안함에 이르렀나?
이 드라마의 결말 즈음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대사다. 극이 가진 기승전결과 그 갈등들의 종막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편안함이란 것은 흥미롭니다. 편안함은 사랑이 주는 값진 과실이다. 편안하여 사랑인지, 사랑해서 편안한지 알수는 없다. 그렇지만 둘은 가까이 있다.
편안(便安)하다.
안이라는 글자는 집 안의 여성을 그린다. Comfort라는 단어는 강함과 관련이 있다. 요새를 뜻하는 프랑스어 어원 fort와 연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안전함과 관련이 있다. 편이란 글자는 사람과 고친다는 글자가 결합된 형태이다. 자신에 맞게 바꾸어가는 어떤 어원일 것이다. 편을 나눈다는 말의 편과 같은 글자이다. 서로에게 맞추어 함께가 된다는 느낌일 것이다. 그리 엄밀한 연구는 아니고, 대강 주워들은 것들을 얼기설기 엮은 이야기지만, 해석은 그럴듯한다. 결국 편안함은 사람과 함께 하여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만들어 주는 것은 역시 사랑이다.
돌이켜보면, 결혼, 더 나아가면 출산이라는 사랑의 귀결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은 함께 안전할 수 있는 무리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가장 연약했던 순간인 출생과 어린 시기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편안했던 기억에 대한 향수가 혹은 결핍이 만들어낸 편안한 공동체에 대한 선망이 모두 이 사랑과 편안함에 대한 열망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함께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본성이다. 사랑은 자타의 경계를 붙이고 흐릿하게 만들어주는 매개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접속사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종으로, 이 세상이라는 세계관으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표현하기위해 붙인 개념인 신으로 나아가는 접속사.
얼마전 있었던 가족들과의 저녁 자리. 그곳에서 느끼는 사랑. 그리고 편안함. 그것은 이 밤거리의 추위에서도, 놀이터 바닥에 바스라진 마른 잎에서도, 현관을 들어서면서 밀려오는 어둠과 냉기에서도 남아있다. 여전히 함께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편안함에 이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