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부활을 꿈꾸는 자

by Damon

한 남자가 직장에서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퇴근한다. 현관문을 열자 아내가 버선발로 뛰어와 남자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춘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여보 좋아하는 제육볶음 해놨으니까 어서 씻고 와요."

남자의 겉옷과 가방을 받아 거실로 들어가며 여자가 말한다.

"아니 매일 고기 먹으니까 좀 물리는걸. 뭐 얼큰한 거 없어?"

남자가 무심하게 대답한다.

"어머, 미안해요. 내일 저녁에 먹으려고 사둔 해물탕 있는데 어때요? 여보가 좋아하는 플레이스테이션 미리 켜뒀으니까 게임하면서 쉬고 있어요. 얼른 만들어 드릴게요."

여자가 따뜻하게 말한다.

"그래 알았어. 그리고 내일 출근 때 입을 셔츠 좀 다려 놔 줘."

"아, 그거 이미 일주일 치 다려놨어요. 오늘은 여보 구두 닦아 놓으려고요."

"아니 당신 홀몸 아닌데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갈색 구두만 부탁해."

남자는 어느새 게임에 빠져든다.

"여보, 이거 맞아요?, 여보, 여보?"

여자가 신발장에서 구두를 가져오며 묻는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지 못한다.

'슈우욱, 퍽!'

여자의 손에 쥐어진 신발이 남자의 후두부를 가격한다.

개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후 업무 복귀를 알리는 알람이 무섭게 울리고 있었고, 휴대전화에는 아내의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

"오빠, 어제 사라고 한 멜론 샀어? 당일 배송인데 왔는지 확인해 줘, 덕복(태명)이가 빨리 먹고 싶다고 하네?"

"오빠, (직접 편집한 방의 도면을 첨부하며) 방 구조를 이렇게 바꾸려면 가구를 이런 식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이번 주말에 해볼까?"

"오빠, 이케아에서 가구 사놓은 거 오늘 조립할까?"

'아차, 멜론 사는 걸 잊었다. 퇴근하면 또 한소리 듣겠네.'

아내의 지시사항을 다시 확인하고, 그녀가 원하는 모범 답장을 보낸 후, 찰나였지만 잠시나마 달콤했던 종전의 꿈을 곱씹으며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내 직장은 여초 집단이다. 쉬는 시간이면 동료들과 가정생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종종 나는 내가 얼마나 좋은 남편인지를 설파하느라 시간을 많이 차지했다. 그럴 때마다 그네들은 그런 칭찬은 본인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며, 이 바닥 겸손해야 한다고 놀려댔다.

실제로 나는 집에서 요리, 청소, 빨래, 설거지, 분리수거, 가계 부채 청산 등등 생활의 8할 이상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내가 임신하고 나서 그 책임은 더욱 늘어났기에, 누구든 나의 고초를 알아주길 원했다.

개꿈을 꾸었던 그날의 주제는 이상적인 배우자상이었다. '매일 오 첩 반상으로 식탁을 가득 채워주는 아내, 퇴근하면 발 마사지해 주는 남편, 음식물 쓰레기를 항상 버려주는 사람'과 같은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주름진 셔츠를 다려주는 아내'라고 말했다. 평소 가정적인 남편임을 자부하던 내가 그런 발언을 하니, (자신들 또한 터무니없는 희망 사항을 언급했던) 사람들은 90년대 주말 연속극에나 나오는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라고, 자기 옷은 자기가 다려 입으라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가부장제 부활! 남자들이여 일어나라!'라고 외치며 가정의 우두머리인 그녀들의 비난을 피해 얼마 없는 남자 동료들과 휴게실에서 전우애를 다졌다.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생긴 스트레스가 쌓였던 걸까? 오랫동안 기다린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도, 아내에게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하게 해 주겠다던 다짐도,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렇다.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그의 사고, 말, 행동에 따라 모든 가족 구성원이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가정에서 자란 나는, 당시 아버지가 누리던 가부장제가 주는 수혜 중 일부라도 내가 꾸린 가정의 틀 안에서 받고 싶었다. 철부지 동생을 등에 업고, 반쯤 해진 받침대 위에 올라간 아버지의 작업복을, 쇠 다리미로 꾹꾹 눌러 가며 다림질을 하시던 어머니의 억척스러움 보다, 잘 다려진 그 옷을 받아 들고, 덤덤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나의 남성성에 더욱 깊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스멀스멀, 주름진 셔츠 대신, 스팀을 먹고 대리석 바닥처럼 빳빳하게 펼쳐진 하얀색 셔츠가 줄지어 선 옷들이, 그리고 그 앞에서 내가 팔을 넣기 쉽게 셔츠를 벌려 잡고 서 있는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늘 저녁에 승부를 보자.'

객기에 오기가 더해져 퇴근 후 마트에서 장을 봐왔다.

일단 저녁상으로 등심 스테이크와 전복 버터구이를 내놓으며 그녀의 미각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만족스러운 식사 후 심신 안정에 좋은 캐모마일 차와 먹고 싶다던 멜론으로 화룡점정을 찍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기야 있잖아, 나는 결혼생활 하면서 항상 꿈꾸던 로망 같은 게 있는데"

"응, 뭐야?"

"아, 별건 아니고, 그냥 나 출근할 때 셔츠만 입는 거 알지? 그거 자기가 다려주면 아침마다 행복할 것 같아!"

"뭐래, 오빠 옷은 오빠가 알아서 챙겨 입으세요."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아내의 시선은 텔레비전 영상 속으로 떠나갔다.

'아니, 내가 집안일 다 하는데, 자기는 퇴근하고 휴대전화만 만지면서, 남편 셔츠 정도는 다려줄 수 있지 않나?'

새로 산 식기세척기에는 그릇과 함께 푸념이 섞여 들어갔다. 서운한 마음이 일었고, 이내 서운함은 그 감정 유발자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게 했다. 소파에 누워 깔깔대는 여인의 발밑에서 청소기가 돌아갔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길에 닫힌 현관문은 평소보다 큰 소리를 내었다. 이후 나는 침묵으로 철옹성을 쌓았고, 피곤한 몸을 침대로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 오자 후회가 밀려왔다. 좀생이 같은 내가 너무 싫어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것이 어려웠고,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저 출근한다고 나가 버렸다.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툴툴거리며 옷장으로 향했는데, 그 안에는 말끔하게 다려진 하얀색 셔츠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세탁소 옷 비닐에 쌓여 광채를 내고 있었다. 셔츠 앞에 붙어 있는 메모지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가끔은 행복하게 해 줄게, 이따 봐.'

바라던 꿈과 맞닥뜨리는 현실 사이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퇴근 후에는 마트에 들러 갈비찜 거리를 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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