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며, 또다시 이동

두 개의 길, 그 첫 번째 막이 끝나고

by 달여리

CTC도 끝이 났다. 하나 다음 하나.

새로운 문을 또 한 번 통과했다.


만신창이였던 무릎이 외려 걸으며 나아졌다. 저질이었던 체력도 부쩍 좋아진 느낌이었다. 걸을수록 지쳤지만 걸을수록 단단해졌다. 더는 걷기 싫으면서도, 더 더 더 걷고 싶어졌다. 먹고-자고-걷는 단순함이 좋았다. 오롯이 몸의 고통에 집중하는 그 모든 순간이 낯설고도 소중했다. 길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완연한 장면들이 있었다. 기억보다 또렷할 이 기록들이 남았다.


소회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과정 속에 다 녹아들었다. 이틀을 푹 쉬었다. 그리고 다음을 준비했다. 아직 계획이 남아 있다. 두 개의 트레일을 걸었지만, 거리로 따지면 아직 절반도 채 안 왔다. 40일간의 890.10km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 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과 11일간의 257.0km 산티아고순례길-포르투갈 해안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긴장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위클로웨이와 CTC, 그 첫 번째 막을 내린다.

섬들을 떠나 이제 육지로 간다.


스카버러에서 리즈를 거쳐 파리로 넘어간다. 딱 두 밤씩 잔 스카버러와 리즈는 모두 날이 흐렸다. 런던에서 환승해 파리까지 가는 플릭스 야간버스는 장장 13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긴 이동이 걱정됐지만, 이곳을 떠나는 건 생각보다 그리 아쉽지 않았다. 버스는 가득 찼다. 편한 자세를 뉘어 흐르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자주 듣던 최백호의 ‘바다 끝’을 반복해 들었다. scarborough fair도 잠시 듣다, Byul과 로로스, 루시드폴 음악을 차례로 들었다.


온통 뿌옜다. 어느새 하늘은 컴컴해졌다. 오후 7시가 되자 도로의 가로등이 켜졌다. 풍경은 사라지고 흔들리는 자동차 불빛만 남았다. 9시가 넘자 버스는 서서히 런던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했다. 하차한 빅토리아 터미널에선 왠지 익숙한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인파에 몸을 섞어 가만히 환승을 대기했다.


그러고 보니 영국과 아일랜드에 41일이나 머물렀다. 길긴 길었다. 오늘 밤 이곳을 완전히 떠난다. 길의 시간이 아무래도 가장 짙었다. 무어와 헤더, 양과 소들, 진흙길과 너덜길, 햇빛과 바람과 안개가 마치 촉감처럼 떠오른다. 도시 구경 중에 만난 아스날 에미레이트 스타디움과 JMW. 터너, 세븐시스터즈와 앨버트독, 스파이어와 더블린포털도 인상에 남았다. 이스트본과 세인트비스, 로빈후즈베이의 해변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영국의 남쪽-서쪽-동쪽 끝의 바다. 마셨던 갖가지 맥주들, 특히 위클로웨이 다잉카우에서의 기네스 생맥주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듯하다. 정말 5년 후 아내와 함께 CTC를 다시 걷을 수 있을까. ‘다음’이 결코 쉽게 오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은근한 기약을 해본다.


오늘이 내일로 넘어가기 1분 전, 파리행 버스에 올라탔다. 이번 여행의 두 번째 막으로 넘어가려는 순간이다.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간다. 밤의 암막이 모두 걷히고 나면, 이 먼 거리를 지나 파리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한국과는 시차가 1시간 가까워진다. 딱 그만큼 여정이 한 발짝 나아갔다.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고 나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동안 CTC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된답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앞으로의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2편-영국 CTC는 내일 오전 8시에 마지막 화(부록)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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