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C와 순례길 사이 그 어디쯤
퇴사 후 여행을 떠났고 어쩌다 보니 여행은 '걷기'가 중심이었다. 일단은 좀 걷고 싶었고, 걷다 보니 걷는 게 더 좋아졌다. 4개월간의 여행에서 4개의 트레일을 걸었다. 15kg의 배낭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사진을 찍고 날마다 글도 썼다. 걸었던 그 시간에 대한 기록을 이제 엮는다. 이 책은 주구장창 '걷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맞이한 비수기에, 걸으며 쓴 B급 수기쯤이 된다.
7일 간 127km 아일랜드 위클로웨이(Wicklow way)를 걸었고, 17일간 315km 영국 CTC(Coast to Cosat Walk)를 걸었다. 그 사이 암스테르담과 브뤼셀, 런던과 이스트본, 더블린과 리버풀, 스카버러와 리즈를 차례로 여행했다. 위클로웨이에서 완전히 망가졌던 무릎이 CTC를 걷는 동안 오히려 회복됐다. 분명 지쳤지만, CTC를 다 걷고 나니 체력은 부쩍 좋아져 있었다.
다음은 산티아고순례길로 간다. CTC와 순례길의 사이, 경유지로 선택한 프랑스 파리로 우선 넘어간다. 밤 사이 도버해협을 건넜다. 리즈를 떠난 지 무려 18시간 만에 파리의 땅을 밟았다. 걸었던 길을 잊을 만큼 피곤하고 멍했다. 내 평생 프랑스하고도 파리라니, 낯설고도 믿기지 않았다. 분이라도 풀 듯 5일 동안 신나게 관광을 즐겼다. 에펠탑과 바스티유광장, 팡테옹, 개선문, 생트샤벨, 몽마르뜨언덕, 사크레쾨르대성당, 루브르박물관, 오랑주리미술관, 오르세미술관, 피카소미술관, 로댕미술관, 조르주퐁피두센터에 베르사유궁전까지. 충분히 먹고 마시고 마음껏 구경했다. 특히 개선문 꼭대기에서 만난 무지개와 노을 녘의 몽마르뜨언덕, 반짝이는 자정의 화이트 에펠탑이 아름답도록 인상에 남았다. 그간의 걸음에 대한 큰 보상이었다. 물론, 재충전도 확실히 됐다.
잘 놀았다. 이제 다시 걸을 차례가 왔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밤 10시, 바욘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바욘을 거쳐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생장피에드포르까지 가는 길이다. 아쉬운 마음에 루브르에 잠시 들러 야경까지 보고 온 참이었다. 골목엔 구슬픈 연주가, 광장엔 어둠의 빛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놀다 보니 이게 또 편했다. 길을 다시 걸으려니 괜스레 막막했다. 그런 마음을 닮은 듯 터미널은 혼잡 그 자체였다. 최대한 잡념을 잠근 채, 몸을 실어 그대로 떠난다. 낯설었던 도시가 금세 익숙해져 그만 섭섭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야속한 버스는 제시간에 재깍 먼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버스는 밤을 날라, 미지의 장소로 향해간다.
어떤 풍경이 걸음을 기다리고 있을까.
두려움과 설렘이 잠처럼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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