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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시를 끌어당기듯 여기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2일 차

by 달여리
만시야데라스물라스~레온(≈18.56km)


호전된 줄 알았던 다리가 밤사이 다시 안 좋았다. 아아아, 하며 몇 번씩 깰 정도였다. 다섯 시가 좀 넘어 짐을 챙겨 나왔다. 준비를 마치고 시간을 보내다 일곱 시쯤 숙소를 나섰다. 기부제 아침 식사가 있었지만 먹지 않았다. 그것보다 어제의 패스트리가 그리웠다. 그 카페가 7시에 문을 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정확히 오픈 시간에 맞춰 나선 길이었다.


부에노스디아스! 설레는 마음으로 Cafetería Alonso에 들어섰다. 아뿔싸, 이른 시간이라 패스트리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모양이다. 주인아저씨께 우는 시늉을 보였다. 패스트리가 먹고 싶어 슬프다고 말씀드렸다. 멋쩍어하시는 아저씨, 어쩐지 기분만은 좋아 보이셨다.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데 벌써 뭔가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눈을 마주치며 서로 피식피식 웃음을 짓고 만다. 아쉬운 대로 다른 빵을 시켜 먹었다. 진한 커피에 아침잠이 다 깬다. 삼십 분쯤 넉넉히 시간을 들여 식사를 마쳤다. 아디오스, 아쉬운 마음을 담아 허리 깊이 숙여 인사를 드렸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이런 다정한 순간을 만날 때면 습관처럼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씨유.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세요.

<애정합니다, Bar & Cafetería Alonso>

며칠새 한쪽이 폭싹 찌그러져버린 달이 하늘이 박혀 있었다. 짙은 아침 밤에 별은 몇 보이지도 않았다. 구름이 깊지 않아 맑은 날이 예상됐다. 그 어둠 속을 걷는데 어느새 뒤따라오신 어느 분께서 대뜸 말을 걸어왔다. 굳이 말을 섞진 않았었는데, 같은 숙소 같은 방에 묵었던 한국 분이셨다. 영어 인사에 한국말로 대답하니 왜인지 놀라는 눈치셨다. 난데없이 통성명을 했다. 호주에 사는 주부시라 한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컴컴한 길을 얼마간 의지했다. 삼사십 분 정도를 그렇게 걸었을까, 어둠이 걷히며 슬슬 시야가 트이자 그녀는 먼저 길을 앞서 가셨다. 절뚝이는 나와는 걷는 속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뒤돌아 손 흔들던 그녀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뒤로부터 서서히 붉은빛이 틔여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길은 도로 옆 흙길이었다. 8시 25분, 첫 번째 마을 Villamoros de Mansilla에 도착했다. 어디선가 맛있는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미 아침 식사도 했겠다, 그러니 bar는 꾹 참았다. 갑자기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뿌연 공기가 잔뜩 몰려왔다. 들판을 덮치더니 도로를 따라 무겁고 느리게 흘러 흘러갔다. 몽환적인 느낌으로 가득했다. 하늘마저 분홍빛이라 아련했다.

<단계별로 아침이 밝아온다>

도중에 작은 간이 bar가 있어 거긴 잠시 들렀다 간다. 마침 화장실이 필요했다. 순례길 배지 구입으로 화장실 이용비를 대신했다. 커피도 팔았지만 딱히 사 마시진 않았다. 쉬지 않고 그대로 길을 이어 걸었다. 숲을 통과해 강을 건넜다. 햇살이 비쳐와 모든 장면에 생기가 돌았다. 싱그러운 새소리가 아침을 더욱 돋웠다. 빛나고 때론 눈이 부셨다.


9시, 두 번째 마을 Puente Villarente을 지난다. 마을이 꽤나 커 보였다. 낮게 비친 빛에 아주 롱-롱-롱다리가 된 그림자, 제자리걸음을 하듯 바닥을 휘휘 휘저었다. 해가 뜨자 오히려 더 쌀쌀해졌다. 귀찮아도 배낭을 벗어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도로를 벗어나 외진 길로 들어섰다. 도로가 없어도 차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해가 조금씩 높아지자 한기는 금세 사라졌다. 땀이 난다. 투덜대며 바람막이를 다시 벗었다.


10시, 세 번째 마을 Arcahueja에 도착했다. 슬슬 허기가 졌다. 마을을 살짝 돌아봤지만 문을 연 bar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낙담하며 마을 벤치에라도 앉아 잠시 쉬었다 간다. 이번엔 어디선가 맛있는 카레 향이 났다. 진짜 냄새가 나는 건지 아니면 욕구가 반영된 건지, 이럴 때마다 헷갈렸다. 얼마 전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는 아내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순간, 김치가 확 당겼다.

<레온으로 조금씩 다가선다>

20분을 더 걸어 오늘의 마지막 중간 마을 Valdelafuente을 통과한다. 이제 정말 뭐라도 입에 넣을 때가 되었다. 오마이갓! 여기도 막상 문 연 bar가 보이지 않았다. 절망에 빠지려던 그 찰나, 어? 마을의 끝자락 건너편에 휴게소 같은 레스토랑이 딱 하나 있는 게 아닌가. 다행이다. 단비와도 같았다. 빠르게 오가는 차를 피해 도로를 휘리릭 건넜다. 휙, 문을 열자 분주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날 쳐다봤다. 올라! 초코레또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갓 나온 초코빵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쓰디쓴 커피가 뜨겁게 넘어갔다. 30분을 노곤히도 쉬었다. 푹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도 야심 차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7km 남았다. 조금만 더, 스스로를 토닥였다.

<앗, 거대한 도시다>

달은 아직 지지 않았다. 그 아래로 제비들이 마구잡이로 날아다녔다. 남은 길은 혼란한 도시의 변두리길이었다. 마지막 힘을 내어 오늘의 목적지 레온(León)으로 한 걸음씩 다가선다. 또 하나의 대도시 부르고스(Burgos)에 들어서며 무리를 했던 게 여즉 다리의 통증으로 남았다. 대도시 외곽다운 특유의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역시나 알 수 없는 조바심 같은 게 일어났다. 오늘은 특별히 더 조심했다. 더 이상 다리가 나빠지지 않길 바랐다. 천천히 느리게, '여유'란 걸 최대한 곱씹었다.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 저기 멀리 레온이 보인다. 그 거대한 도시가 걸음에 맞추듯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도시 풍경>

11시 20분, 레온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그 경계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아직까진 변두리 마을의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지나가며 인사를 건네는 주민들도 만났다. 지역사 박물관이 있어 부러 들러 구경도 했다. 도시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안으로 안으로 한 땀 씩 탐방했다. 버거킹이 보인다. KFC가 괜스레 반갑다. 오늘의 목적지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은 진작부터 보였는데, 성당이 있는 도시 한가운데가지는 30분을 더 걸어가야 한단다. 다리가 아파 만나는 벤치마다 쉬어갔다. 다 왔는데도, 아직 멀었다. 실제 거리보다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레온 대성당에는 1시간 후에야 도착했다. 하지만 그 순간 힘겨움도 완전히 잊었다. 한껏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자태에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눈이 부셨고 또 아름다웠다. 목이 아플 만큼 올려다보았다. 주변의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

스페인 고딕건축의 정수라 불리는 레온 대성당은 그 위용이 대단했다. 이리저리 살피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특히 1,800㎡가 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가히 압권이라고 그랬다. 중세부터 20세기까지의 종교적 주제를 약 125개의 창을 통해 빛으로 그려놓았단다. 일단은 숙소 체크인부터 한 뒤 다시 찾아와 보기로 했다. 미리 예약해 둔 알베르게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사실 정말 레온에서 한의원 치료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자세히 찾아보니 100유로 정도로 (내 기준으론) 치료비가 상당히 비쌌다. 오늘 걸으며 깊이 고민을 한 끝에 결국 치료는 안 받기로 결정했다. 아픈들 상태가 아주 조금씩이라도 호전은 되고 있었고, 그 비용을 쓰는 대신 차라리 동키 서비스를 여유롭게 이용하는 게 더 나을 성싶었다. 치료 후 하루이틀 휴식을 요한다는 점도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한 요인이 됐다. 도시에서의 연박은 아무래도 썩 내키지가 않았다. 아무런 근거도 없으면서 다리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이 선택이 독일지 득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없다.

<도시 풍경>

이틀 전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o)의 공립알베르게에서 한날 묵었던 한국 분들을 만났다. 한 분은 37km를 한 번에 걸어 어제부터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나머지 한 분은 나처럼 이제 막 도착한 터였다. 이왕 만난 거 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세탁소에 들러 세탁·건조를 나누어 돌리고 이리저리 골목 구경도 하고 그랬다. 그 사이사이 유명하다던 초콜릿 추로스도 사 먹고 성당도 구경했다. 가우디 건물로 유명한 Museo Casa Botines Gaudí는 겉으로만 관람했다. 에스테야(Estella)에서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었던 선생님까지 어쩌다 합류하셔, 저녁은 네 명이서 근사하게 해결했다. 와인까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금세 9시가 훌쩍 넘었다. 네 명 중 두 명은 내일 길을 걸어야 했다. 남은 두 명은 연박을 할 거란다. 그쯤에서 헤어졌다.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기에 아쉬움의 인사를 아쉬운 대로 나눴다.

<실내도 외관도 모두 근사한, 레온 대성당>

돌아와 짐부터 후다닥 다 챙겨뒀다. 양치를 하고 곧장 자리에 누웠다. 포근한 이불까지 주는 알베르게라 그런지, 몸이 절로 스르르 녹았다. 침대에 커튼까지 달려있어 프라이버시 잠으로는 아주 딱이었다. 맛있는 걸 먹고 말겠다는 레온의 포부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해결이 됐다. 배가 한껏 불렀다. 씩씩 거리면서도 눈을 감았다. 포식과 와인 덕택인가. 잠은 순삭. 꿈도 밤도 없이, 새벽의 걸음으로 순식간에 건너뛰고 말았다.



2024.10.21.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2일 차(누적거리 461.12km)

오늘 하루 41,770보(27.5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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