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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같던 아침, 뮤직 스튜 가우디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4일 차

by 달여리
산마르틴델카미노~아스토르가(≈24.19km)


걱정대로 겨우 일어났다. 그래봤자 여섯 시였다. 바로 나와 준비를 마쳤다. 바나나 하나로 아침을 해결했다. 맞아, 오늘부터는 동키로 배낭을 보내지 않기로 했지. 다리를 휘휘 저으며 상태를 체크했다. 조심조심 걸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발목과 정강이 그리고 다리가 잘 견뎌주길 바랐다. 모처럼의 배낭은 묵직했다. 그래도 그 익숙한 느낌이 조금은 반가웠다.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in del Camino) 마을은 아주 작아,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금방 벗어났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옆을 따라 걸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비춰줬지만 걷기엔 방해가 될 뿐이었다. 대체로 길은 암흑이었다. 바지주머니에 넣어둔 헤드랜턴을 꺼내 모자에 채웠다. 기껏 길의 부분만 겨우 보였지만 며칠간 내내 걸어왔던 것과 비슷비슷한 풍경이라는 건 느낌만으로도 확실했다. 옥수수밭과 송전탑, 도로와 흙길의 연속이었다.

241023_iphone_0892(edit2)(resize2).jpg <아침 별빛 옥수수밭>

누군가는 길을 걸으며 생각이 많아지고 누군가는 비워진다고 했다.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여전히 잘 알지 못하겠다. 어쩌면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 같았다. 단어 짓지도, 문장을 맺지도 못한 상념만이 둥그렇게 폴폴 떠다녔다. 내용은 없고 뉘앙스만 있었다. 처음 걸었던 위클로웨이에서도 그랬고, 여전히도 그랬다. 랜턴 빛에 갇힌 시야처럼 좁았다. 길을 걷는 시선 따라 흔들리고 흐트러진다.


바닥 곳곳에 지어진 개미집이 저마다 바쁘다. 달팽이는 보이지 않을 만큼 느렸다. 아침부터 도로가 시끄러웠다. 귀를 막듯 머리를 푹 숙인 채 한참을 걸었다. 문득 고개를 들면 구름 사이로 몇 점의 별이 보였다. 도로에서 벗어나 들판 사이로 든다. 여덟 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한밤처럼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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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새벽, 아침이 동시에 머문다>

8시 5분, 첫 번째 마을 Hospital de Órbigo에 도착했다. 조명이 비친 근사한 다리를 건너 마을의 중앙으로 다가선다. 그 다리의 끝, 고급 호텔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따뜻한 빵과 커피로 아침을 제대로 챙겼다. 테라스에 앉아 밝아오는 여명을 즐겼다. 초단위로 변주해 가는 하늘, 오로지 혼자만을 위한 풍경 같았다. 다리의 조명이 일제히 꺼지자 신호처럼 새소리가 와락 들려왔다. 날은 붉게 깊게 느리게 타올랐다.


8시 40분쯤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걸어보니 이 동네도 뭔가 규모가 좀 있다. 곳곳에 알베르게가 많이 보였다. 머물러가기에도 나쁘지 않은 곳 같았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다시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선명했던 여명에 비해 하늘은 다소 흐렸다. 떠오르는 태양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치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어라? 태양이 떠오른다. 흐렸던 게 두터운 구름 때문만은 아니었나 보다. 교회 종탑으로 동그란 게 환히 부셨다. 걸음을 멈추고, 시간이 멎은 듯 잠시 풍경을 기다렸다. 잠겼던 해가 제 모습을 드러내자 세상만사는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맑은 빛이 가득 차오르는 장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때마침 9시 종소리가 들려왔다.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한껏 보듬었다.


빛이 낮게 닿는다. 짙은 이 시간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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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들판, 마을>

9시 20분 세 번째 마을 Villares de Órbigo, 9시 55분 네 번째 마을 Santibáñez de Valdeiglesias를 차례로 지났다. 어느새 도로 전혀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고요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흙길로 언덕과 언덕,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었다. 조용한 만큼 차분해졌다. 오랜만에 멘 배낭이 힘겹긴 해도 온전히 걷는 이 느낌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다리가 아픈들 이만하면 걸을 만은 했다. 어려운 길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241023_A1_063(edit2)(resize2).jpg <노을 같던 아침>

밭 사이로 난 붉은 흙 자갈길을 오르다 십자가가 있는 쉼터에서 잠시 쉬어간다. 누군가 언덕 위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그건 사람이 아니라 동상이었다. 떨어진 건지 두고 간 건지,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가 탐났지만 혹시 몰라 손을 대진 않았다. 주홍길 초록잎, 앉아서 바라보는 모든 장면이 선명했다.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내 모습인양 한참 동안 그를 가만히 구경했다. 아직 남은 길은 멀었고, 아프긴 아팠다. 아직은 틈틈이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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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했던 적색길>

아주 살짝씩만 오르막인 이 적색길의 적막함이 마음에 들었다. 뜨자마자 구름에 가려졌던 해도 다시금 드러나기 시작했다. 너덜길이 심해졌다. 더욱 조심히 발을 디뎌갔다. 발목과 정강이가 슬슬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참에 딱 적절히도 덩그러니 웬 bar가 하나 있었다. 황량이 아무것도 없을 이 길의 가운데 꿈결처럼 만난 '빛'이었다. 너무 뜬금없어 외려 놀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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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의 단비처럼, 기부제 bar인 El Jardín del Alma>

아스토르가(Astorga)까지 6km 남았다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매대에는 갖가지 과일과 간식거리가 예쁘게도 차려져 있었다. 셀프로 찍는 세요(sello)가 꽤나 근사했다. 친근한 강아지가 놀아달라 치근댔고, 상냥한 고양이는 템테이션을 잘도 받아먹는다. 멍하니 머물기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낡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아 한동안 햇빛을 쬐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반나절만 드러누워 있고 싶었다. 누군가가 어설프게 기타를 연주했다. 모른 척 감상하고, 바쁜 척 여유를 즐겼다. 남은 길이 아쉬웠고 지금의 순간이 아까웠다. 그럼에도 엉덩이를 털고 단단히 일어서야 했다.

<어느 '그'의 음악>

하늘엔 여태 반달이 떠 있었다. 언덕의 끝, 십자가상에서부터 큰 마을이 저 아래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2시 10분,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마을인 San Justo de la Vega를 통과한다. 슬슬 무리였다. 다리가 좀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 bar라도 들어가 쉬었다 가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가 아니라 완전히 배낭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라리 얼른 다 걷고 나서 제대로 쉬고 싶었다. 이제 4km 남짓 남았다. 마지막 힘을 윽-윽- 쥐어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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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가에 다다른다>

유유하게 날아가는 두루미 한 쌍이 있었다. 강을 건너 성당의 첨탑이 보이는 아스토르가(Astorga)로 조금씩 다가섰다. 드넓은 옥수수밭을 지난다. 지그재그 육교로 철길도 넘는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랐다. 1시 10분 드디어 공립알베르게에 도착을 했다. 안도가 기쁨처럼 쏟아졌다. 선착순이지만 아직 침대는 많이 남았단다. 다리 상태를 설명했지만 매정하게도 2층 침대로 배정해 주신다. you young guy는 무조건 2층이란다. 웃어 보였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체크인을 하고 샤워와 빨래를 했다. 훤한 뒷마당까지 있어 넋 놓고 쉬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땡볕이라 오늘도 빨래는 잘 마를 듯했다. 목욕재계한 깔끔한 몸에 신선해진 머리, 고통은 금세 잊고 세상 편한 마음이 들었다. 2층 침대를 오르내리는 게 끔찍하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 전까지 눕지 말자, 최대한 침대 오르내리기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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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리무초와 동네산책>

그토록 쉬고 싶었으면서도, 바로 밖으로 나왔다. 일단은 식사부터 해야 했다. 비프스튜가 맛있다던 근처의 다른 사립알베르게로 향했다. 뭔가 익숙한 맛이 있었다. 김치만 있으면 딱 좋겠는데, 아쉬운 대로 꼭꼭 씹어먹었다. 다시 시킨 깔리무초는 달고도 시원했다. 음, 이건 앞으로도 자주 즐길 게 분명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동네를 구경 삼아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4시 오픈 시간에 맞춰 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Astorga)과 가우디 건물(Palacio de Gaudí Astorga)에도 들렀다. 성당은 세요(Sello)만 받고 굳이 유료 입장까진 하지 않았다. 가우디 건물은 못 참았다. 순례자 할인을 받아 5유로에 입장했다. 바르셀로나 이외의 장소에 세운 가우디의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였다. 유연한 건물의 선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벽면의 단순한 조각과 일정한 패턴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금방 보고 나오려 했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구경하고 말았다. 결국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마무리처럼 맥주까지 한 잔 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사과 하나로 퉁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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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가 성당과 가우디 건물>

일찌감치 누웠다. 누우니 피로가 아래로 쏠리며 스르륵 녹는다. 다리가 욱신거리며 흐물거렸다. 이제야 좀 쉬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잠만 자면 됐다. 내일은 산을 오르는 길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놓고 일찍 일어날 셈이었다. 굳이 알람을 맞추진 않지만 적어도 다섯 시엔 일어나리라 마음을 먹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열 시 좀 넘어 침낭을 깊이 덮었다. 뜻밖의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눈을 감자마자 피곤에 짓눌린 듯 잠으로 곧장 빠져들어갔다.



2024.10.23.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4일 차(누적거리 509.80km)

오늘 하루 46,092보(27.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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