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6일 차
폰세바돈~폰페라다(≈26.77km)
너무 일찍 출발할 생각은 없었다.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에서 이왕이면 일출을 보고 싶었다. 다섯 시에 절로 눈이 떠졌다. 멀뚱멀뚱 기다리다 여섯 시를 넘겨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준비된 조식으로 식사를 마치고선 일곱 시 반에 출발했다. 바깥은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추웠다. 좀 더 따습게 입고 나올 걸 후회했다. 땀나도록 걸으면 금방 괜찮아지겠거니 했다.
부슬비인지 안개인지가 끊임없이 눈앞으로 몰려왔다. 일출은 물 건너갔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어둠의 산 길 위로 랜턴 빛만 둥둥 떠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는 확 굵어졌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흙 길 위로 덩그러니 멈춰 어떻게든 우비를 꺼내 입어야만 했다.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을 수도 없어 별 희한한 자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중어둠의 생쑈, 그동안 몇 번 해봤다고 나름 능숙하긴 했다. 여름용이지만 장갑까지 꼈다. 금방 쫄딱 젖어 맨손을 번갈아 호호 불며 걷는 게 더 나았다. 축축해지니 더욱 추웠다.
8시 10분, 철의 십자가는 갑자기 나타났다. 오르막이라고 한들 폰세바돈(Foncebadón)에서 겨우 2km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 서 계신 분들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만큼 컴컴했다. 꼭대기에 작게 달린 십자가는 헤드랜턴으로 지긋이 비춰야 겨우 보일 정도였다. 어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종종 만났던 한국 분들이셨다. 덕분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증샷을 남겼다. 사실 마다하던 걸 자꾸 권유해 마지못해 찍은 거긴 했다. 기대치도 않았는데 정말 놀랍도록 멋지게 찍어주셨다.
잊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둔 염원의 돌멩이를 붙들었다. 원래는 고향의 돌을 들고 와 힘들었던 여정의 짐을 여기에 내려놓는 의미로 소망을 비는 거라 한다. CTC에서의 관습이라던 세인트비스(St.Bees)의 돌을 로빈후즈베이(Robin Hood’s Bay)에 던지는 행위도 하지 않았던 나였다. 비록 아스토르가(Astorga) 근처의 흔하디 흔한 돌이긴 하지만, 이번엔 여기에 진심으로 마음을 담았다. 함께-용기-우리, 양손으로 꾸욱 잡아 한 번 더 세 단어를 읊조렸다. 그러곤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살포시 올려놨다. 다시 찾으래야 찾기도 어려울 만큼 아주 평범한 돌이다. 그것으로 족했다. 염원이란 으레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일출을 기다려봤자 비만 더 맞을 것 같았다. 뒤편으로 비를 피할 지붕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젖은 추위는 막을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게 나았다. 망설이지도 않고 길을 바로 내렸다. 굽이친 도로의 방향대로 흙길이 따랐다. 비는 거세졌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오, 오래 걷지 않아 비바람 속 셸터를 만난다. 광야의 샘물에 비할 바 없는 여느 작은 bar가 어둠 속에 반짝 피어나 있었다. 루트에 표시된 'Manjarín'이 바로 여기였다. 가격도 착했다. 세요(sello)도 예뻤다. 커피와 삶은 계란을 사 먹었다. 화목난로를 쬐며 몸을 조금이라도 녹였다. 말렸다.
이후 기나긴 하산길이 이어졌다. 오늘의 힘 빼기는 실패,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발끝에 바짝 힘을 주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안개가 잔뜩 꼈다. 비는 오락가락했다. 고사리밭과 키 작은 사철나무들, 볼품없는 풀과 알알이 맺힌 빗방울들. 흐릿한 풍경 위로 선명한 줄기들이 가로졌다. 꽃처럼 피어난 이끼들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간 걸었던 도로길에 비하면 이 산행이 즐겁기까지 했다. 날이 개긴 갤건지 안개가 흔들리다 일순간 구름이 걷히곤 했다. 순간순간 드러난 빛이 아름다웠다. 사방을 둘러보다 그때마다 걸음을 멈췄다. 희미했으나 따스했다. 온통 눅눅한 이 길 위로 핀 그 유일한 온기에 살며시 마음을 기댔다.
높은 능선을 따라 걸었다. 이내 깊게 깊게 내렸다. 산세를 잇는 도로가 유려했다. 드라이브 즐기기 딱 좋아 보였다. 눈 내린 풍경을 상상했다. 햇살 가득 풍성한 여름날도 궁금했다. 지금은 코앞의 땅바닥에 우선 집중했다. 발이 아릴 만큼 심하게 울퉁불퉁했다.
다들 축지법이라도 쓰는지 쏜살같이 지나갔다. 노력한들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오른쪽 발목이 많이 아파왔다. 당장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이 통증이 앞으로 문제가 될까 또 걱정이 됐다. 미리 조심해 걷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절뚝이며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좀 쉬고 싶을 그즈음, 드디어 제대로 된 마을에 도착했다. 11시 5분 El Acebo였다. bar에 들러 커피로 몸을 데워간다. 발목을 쉬어간다.
다음 마을 Riego de Ambrós에는 11시 50분쯤 도착했다. 나이 많은 강아지와 화려한 꽃 장식의 어느 집을 만났다. 동네가 의외로 컸다. 아기자기한 감도 있었다. 대놓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빗방울은 여태 멎지를 않는다. 너덜길이 가팔라 내려가는 게 버거웠다. 주변 풍광이 예뻐서 좋긴 했다. 밤톨들이 보송보송, 돌과 낙엽이 부슬부슬. 저 멀리 산세가 나름 으스댔다. 아주 작게 드러난 먼 도시가 멀리서도 화려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아마도 저기가 오늘의 목적지 폰페라다(Ponferrada)겠지? 걸어도 걸어도 가 닿지 않을 만큼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은 이 산부터 다 내려가는 게 먼저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이 돌길에 무릎과 발목 모두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햇빛이 난데없이 쏟아졌다. 되게 향기로운 꽃향기도 났다. 그런데도 비가 또 억수처럼 내렸다. 우비를 입고 벗고 하는 것도 이제 도가 다 텄다. 1시 15분, 드디어 하산을 끝났다. 그 증명인 양 나타난 Molinaseca 마을이 아주 근사했다. 비를 피하듯 bar에 들러 깔리무초를 시켰다. 30분을 쉬었나, 나왔더니 햇빛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껏 반짝이고 있어 어쩐지 약이 올랐다. 아직 7km가 넘게 남았다. 꽤나 지쳤지만 여기서부턴 길이 수월할 듯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으랏샤, 마지막 힘을 즐거이 짜낸다.
도로 옆 인도가 이토록 반가울 줄 몰랐다. 보도블록 깔린 평탄한 길이었다. 온 걸음에 신경을 바짝 쏟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싱그러운 빛이 있었다. 상쾌한 새소리도 있었다. 손을 맞잡은 듯 서로 이어진 가로수 나무길이 길게 이어졌다. 평화로운 구름, 도로, 마을을 지난다. 가파른 너덜길을 다 내려오고 나자 신기하게도 더 이상 발목이 아프지 않았다. 당당한 워킹을 척척척, 첫걸음마라도 뗀 듯 씩씩한 기운이 난데없이 흘러넘쳤다.
2시 25분, 마지막 마을 Campo de Ponferrada를 지난다. 언덕 위로 펼쳐진 알록달록한 농장이 아름다웠다. 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괜찮았다. 우비야 다시 걸치면 그만이었다. 폰페라다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맛있는 피자 냄새가 솔솔 피어나 꼬르륵 폭발적인 배고픔이 일어났다.
2시 45분, 드디어 폰페라다(Ponferrada) 표지를 지났다. 신기할 정도로 딱 비가 그치더니 햇빛이 쨍쨍 쏟아졌다. 파란 하늘이 도시를 반긴다. 노란 포플러 나무들이 한들한들 손인사를 건넸다. 고가도로를 지나 3시 반 예약해 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온몸이 씩씩거리는 느낌이다. 지칠 때로 지쳐 만신창이가 된 것만 같았다. 씻고 나면 괜찮아질 듯, 일단은 옷부터 바싹하게 얼른 갈아입고 싶었다.
대단하다 이 날씨, 씻고 나오니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지 아플 만큼 배가 고팠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식당이 하필이면 씨에스타에 걸렸다. 마침 같은 알베르게에 익숙한 한국분이 계셔 다행이었다. 점심은 인스턴트로 간단히 해결하고 저녁을 온전히 챙겨 먹자 하신다. 그녀가 근처에서 장을 봐오는 동안 나는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를 돌리기로 했다. 식사도 빨래와 건조도 나눌 수 있어 여러모로 감사했다.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에서부터 자주 봐왔던 데다, 오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걸어왔었다. 철의 십자가 인증샷의 바로 그분이셨다. 이래저래 마음도 편했다. 그리고 저녁은 정말인지 제대로 푸짐했다.
멋진 풍경에도 힘든 하루였다. 비를 참 많이 맞았다. 길기도 높기도 했지만, 오락가락 날씨에 아주 정신없는 하루가 됐다. 이 마을에 근사한 성곽이 있다는 데 차마 야경까지 볼 체력은 안 됐다. 지쳤다. 많이 지쳤다. 피곤한데도 왜 이리 잠은 안 오는지. 한 마리 두 마리 양을 한참 세다 못해 말과 소, 닭과 호랑이까지... 그러다 결국 어둠 속 가득 떠오른 반려묘 호야와 모무의 귀염뽀짝 얼굴에 한탕 몸부림까지 쳤다. 보고 싶음에 잠기듯 언젠가 잠들긴 잠들었다. 불면마저 지친 듯 결국 잠에 쓰러지긴 했다.
2024.10.25.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6일 차(누적거리 561.74km)
오늘 하루 42,164보(25.5km)
*어느덧 크리스마스이브네요. 부디 행복한 크리스마스 시즌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귀하고도 바쁠 연말의 시기에도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선물처럼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된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연말에도 새해에도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