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 사이 깊숙이 리틀 콤포스텔라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7일 차

by 달여리
폰페라다~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23.66km)


누군가의 알람을 시끄럽게 울렸다. 여섯 시 즈음이었다. 선뜻 일어나기가 버거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특히 등이랑 엉덩이가 아팠다. 한참동안 울리던 알람은 꺼졌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섬주섬 이층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조심 짐을 챙겨 나왔다. 센서등이 켜진 복도는 고요하고 서늘했다. 옷을 마저 차려입고 배낭을 완전히 다 꾸렸다.


건조기를 돌렸더니 확 쪼그라들어버린 모자가 아주 힙해져 버렸다. 허접한들 CTC에서 잃어버렸다가 헐레벌떡 되찾은 귀하디 귀한 모자였다. 머리에 얹어 쓰고 멋 부리듯 길을 나섰다. 버프에 바람막이 후드까지 단단히 덮었지만, 바깥은 의외로 춥지 않았다. 6시 50분 길을 시작한다. 이른 아침의 거리는 역시 밤의 형태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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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의 폰페라다>

성곽 옆을 지난다. 아쉬운 대로 어제 못 본 야경을 대신했다. 예쁜 상점들을 따라 광장을 통과했다. 문 연 bar가 딱 한 군데 있었지만 굳이 들리진 않았다. 골목골목 켜진 가로등이 한껏 분위기를 자아냈다. 강 따라 어두운 공원을 걸었다. 물소리가 깊었다. 랜턴 빛이 쪼그라들며 나뭇잎이 흔들거렸다.


아무도 없는 그 으슥함이 무서워 휘파람이라도 휙휙 불어 본다. 음절 없이 돌고 돌다 문득 떠오른 달려라 하니만 자꾸 반복이 됐다. “엄마가 보고 싶음 달릴 거야, 두 손 꼭 쥐고”라든가 “외로워 눈물 나면 달릴 거야, 바람처럼"이라니. 가사를 곱씹어보니 참 슬프고도 허전하다. 돌아가신 아부지 생각이 갑자기 많이 났다. 그런데도 그 리듬에 이상할 정도로 힘이 났다.


나무속에 숨어있던 검은 새들이 갑자기 푸덕푸덕 날아올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시커먼 강아지가 듬성듬성 다가와 바짝 긴장하기도 했다. 곳곳을 탐방하듯 긴 도시를 구렁이처럼 빠져나갔다. 변두리의 마지막 동네까지 통과하고 나니 더 이상의 가로등도 없었다. 랜턴에 비친 바닥에 축축한 기운이 반사됐다. 몇 방울의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해 바짝 긴장감을 세웠다. 뒤를 돌아 멀어지는 폰페라다(Ponferrada)에 안녕을 고했다. 고요한 어둠의 길이 잠시 나만의 것이 된다.

241026_A1_032(edit2)(resize2).jpg <흐린 하늘의 서광>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순례길에서의 굴다리는 일종의 메타포 같았다. 어제를 빠져나가는 출구이자 오늘로 다가서는 입구.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마을이나 도시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아마도 복잡한 도로 때문이겠지만, 굴다리를 통과할 때면 하나씩 단계를 넘어가는 기분이 든다.


외진 길을 걸어 8시 첫 마을 Columbrianos에 도착했다. 지팡이 모양의 방향 표시물이 나름 매력적이었다. 문 연 곳이 하나 없어 아쉬움을 머금고 길을 이었다. 이쯤 되자 랜턴 없이도 시야가 가늠되기 시작했다. 다만 하늘은 잔뜩 흐렸다. 한 땀 씩 틔여오는 아련한 빛도 없이 그저 푸르른 어스름으로만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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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마을 Fuentesnuevas를 지나며>

8시 35분, 두 번째 마을 Fuentesnuevas. 오! 문을 연 bar가 하나 있었다. 반가움에 절로 가벼운 발걸음이 된다. 초코레또 빵과 아메리카노를 시켜 아침의 허기를 달랬다. 화장실 사용도 편히 했다. 며칠째 익숙한 얼굴의 외국 분들과 가벼이 인사를 나눴다. 20분 정도를 쉬었다. 다시 출발하려니 곡소리가 절로 났다. 에구구구구,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굴뚝 연기가 폴폴 오른다. 타는 냄새가 짙게 풍겼다. 쌀쌀해진 공기에 얇은 후드로 머리를 덮었다. 투박하나 사랑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와 마당의 싱그러운 올리브나무 한 그루. 잠시 들른 작은 성당(Nuestra Señora de la Asunción)에서 뜻밖에 환대를 받았다. 얼핏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가 싶더니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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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포도밭을 잇는다>

9시 25분, 세 번째 마을 Camponaraya다. 꽤나 큰 마을이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았다. 되도록 빠르게 통과했다. 고가를 넘어 골목을 빠져나간다.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소음이 사라지자 마음의 여유가 잔잔히 찾아든다. 잊고 있던 포도밭이 나오기 시작해 어쩐지 반가웠다. 걸음도 나름의 흥을 조금씩 되찾아간다. 애기 포도나무들이 짤막짤막 귀여웠다. 언덕을 따라 줄지어진 밭들이 가지런해 아름다웠다. 얼룩처럼 피어난 안개구름이 느리게 느리게 흘렀다.


풍경의 능선 위로 길의 방향을 턱 가로막은 먼 산세가 눈에 또렷이 박혔다. 검고 길게 엎드려 근심처럼 무겁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마 저기가 맞을 거다. 내일 오를 고지대 마을 오세브레이로(O Cebreiro)는 해발고도가 1,300m쯤이 된다. 철의 십자가와 피레네 산맥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곳이자, 프랑스길의 거의 마지막 고비다. 미리 걱정이 됐다. 이른 걱정 따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벌써부터 찌뿌둥했다.

241026_A1_065(edit2)(resize2).jpg <남은 거리 앞자리가 1로 바뀌었다>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에 새들이 듣기 좋은 화음을 넣었다. 슬쩍 잊곤 하는 길 위의 다양한 오감들이 생기롭게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대놓고 내리진 않아도 빗방울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긴 했다. 오다 말다 간을 보듯 그런 날씨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불현듯 세 자릿수의 앞자리가 2에서 1로 바뀌었다. 표식에 표시된 남은 길은 198.5km. 대수롭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 사소한 숫자 하나에 뿌듯함이란 게 몽글몽글 피어났다. 2와 1의 무게감은 확실히 달랐다. 확연히 가까워진 느낌이 들자 없었던 힘까지 불쑥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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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마을 Cacabelos를 지나며>

10시 40분, 네 번째 마을 Cacabelos였다. 고즈넉하고 근사한 느낌이 있었다. 20분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못 참고 또 초코레또 빵을 시켰다. 성당(Iglesia de Nuestra Señora de la Plaza)과 관광안내소에도 들러 세요(Sello)를 받았다. 햇빛이 확 내리기 시작해 모든 것이 예뻤다. 내게도 절로 환한 미소. 빛이 평화처럼 스며들었다.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도로를 따라 오르막이었다. 숨이 찼다. 인도가 따로 없어 걷기도 불편했다. 11시 50분, 마을이라기엔 너무 작은 Pieros를 스치듯 통과한다. 잠시 내리막이었지만 흙길로 빠지자 다시 오르막이 나왔다. 대놓고 헉헉댔다. 철의 십자가를 넘어 너덜길을 길게 내린 어제의 여파가 아직 남았다. 포도나무의 노란 이파리를 구경하며, 겨우겨우 힘을 냈다. 어디선가 사냥이라도 하는지 웅장한 총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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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플랑카 델 비에르소로 향하는 길>

띄엄띄엄 집들이 나오며 목적지 마을로 서서히 다다른다. 방심하다 갑자기 담벼락을 넘어 짖어댄 강아지에 왁! 육성을 내지르며 거의 주저앉고 말았다. 어떤 분주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호젓했던 길 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밤을 줍는 주민분들이 계셨다. 산책을 즐기는 여행객도 있었다. 이윽고 도착했다. 12시 55분, 언덕을 내리듯 깊숙이 내려앉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였다. 시끌벅적 소란이 들린다. 마을 초입에 있는 산티아고성당(Iglesia de Santiago) 앞엔 단체객들이 한껏 몰려있었다.

241026_A1_156(edit2)(resize).jpg <산티아고성당 앞의 단체객들>

이 성당에는 성년에만 열린다는 '용서의 문(Puerta del Perdón)'란 게 있다. 부상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순례를 잇지 못하는 순례자에게 완주에 준하는 면죄(Indulgence)를 예외적으로 허용했던 장소였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끝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이 용서의 문을 지나면 완주로 쳐준다는 뜻이다. 덕분에 이 마을은 작은 콤포스텔라(Little Compostela)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순례 외에도 궁전이나 수도원 등 다양한 유적이 있어 현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마을인 듯했다. 깃발을 든 안내의 기수들이 곳곳에 있었다. 몇몇 무리들이 쪼르르 각자의 깃발을 따라 몰려다녔다. 들어보니 우리나라에선 스페인 하숙이라는 예능의 장소로 나와 유명해졌다고 한다. 순례길 초반에 만난 대만 분이나 이 길이 버킷리스트였다는 한국 친구가 말했던 예능이 아마 그 스페인 하숙을 뜻했던 것 같다. 나로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특별한 감흥 같은 건 없었다.

241026_A1_154(edit2)(resize2).jpg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근사한 성과 오래된 건물들을 지나쳤다. 주변의 산세에 폭 싸인 마을이라 그런지 왠지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골목을 내려 미리 예약해 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부엔까미노 앱 최고 평점의 숙소답게 근사한 분위기가 서려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얼른 샤워부터 했다. 손빨래는 속옷 등 아주 기본적인 것들만 했다.


배가 고파 얼른 주변의 식당부터 찾았다. 분명 영업 중이었는데, 씨에스타라며 두 군데에서나 튕기고 말았다. 배고픔도 배고픔인데 괜히 마음만 상했다. 허탈히 골목을 서성이다 마침 디아(Dia) 마트를 발견하곤 생각을 아예 바꿨다. 헤매느니 숙소에서 간단히 조리해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냥 간단히 장을 봐왔다. 더 저렴하지만 차라리 푸짐했다.


숙소로 들어서는데, 이제 막 체크인을 하고 계신 한국 분이 계셨다. 어? 익숙한 얼굴이다. 어제 식사와 빨래를 나눈 '철의 십자가 인증샷' 바로 그분이었다. 약속한 것처럼 또 같은 알베르게였다. 지친 얼굴을 확인하며 피식 서로 말도 없이 웃었다. 함께 이른 저녁을 먹기로 하고 잠시 기다렸다. 각자가 준비한 점저를 사이좋게 나누어먹었다. 싸구려 와인도 맛 좋게 넘어간다. 덕분에 심심하지 않게 포식했다. 배가 든든하니 이제 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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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동네 산책>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상을 정리했다. 배도 부르고 해서 곧장 동네 산책을 나섰다. 수녀원과 성당을 둘러봤다. 골목을 기웃거리다 광장의 bar에서 맥주 한 잔 간단히 혼자 2차도 즐겼다. 내일은 긴 오르막이 예정된터라 힘겨움이 예상됐다. 배낭을 동키로 보낼까 하다 그만 마음을 접었다. 그냥 스스로를 믿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 할 고생, 양 어깨를 토닥토닥 미리 보듬어주었다. 캬! 맥주 한 모금이면 이 엄한 걱정도 훌러덩 씻겨 내려간다. 됐고 지금 당장 기분이 좋다. 슬그머니 해가 저무는 광장, 오가는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구경했다.



2024.10.26.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7일 차(누적거리 585.40km)

오늘 하루 42,164보(25.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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