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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에서 2, 그리고 첫 깔리무초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3일 차

by 달여리
레온~산마르틴델카미노(≈24.49km)


잘 잤는데도 피곤했다. 기계처럼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을 기어코 외면했다. 힘을 쥐어 짜내듯 몸을 일으켰다. 레온(León)에서부터는 다시 배낭을 메고 걸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다리가 아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동키로 배낭을 보내되 대신 조금 더 먼 거리를 걸어가 보기로 했다. 목적지로 정한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ín del Camino)의 알베르게는 자기 전 이미 예약을 해뒀다. 미리 짐을 다 싸둔 덕에 채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7시부터 가능한 무료 조식이 아까웠지만, 식사 없이 6시에 출발했다. 거리는 적막에 두터이 휩싸여있었다. 깊이 들이쉰 숨을 몇 차례에 나눠 내쉰 뒤, 첫걸음을 내디뎠다.

241022_A1_003(edit2)(resize2).jpg <도시의 변방>

휘황한 밤이 끝난 번화가는 조용하고 공허했다. 멋진 조명이 모두 꺼진 레온 대성당은 컴컴하나 그럼에도 은은한 제 빛을 분명히 발하고 있었다. 걷다 보니 거리 곳곳 근사한 건물들이 많았다. 스페인이라는 국가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레온을 이렇게 스쳐서만 지나간다. 구석구석 제대로 구경하고 살펴보지 못한 건 아쉬웠으나, 단 하루만 머물고 길을 나서는 것에 후회는 전혀 없었다. 분주함보다는 느긋함을, 화려함보다는 수수함을 더 원했다. 도시를 떠나는 마음이란 이토록 홀가분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골목은 끝도 없이 늘어지고 길어졌다. 마치 벗어나기 어려운 늪처럼 골못 사잇길이 이어졌다. 레온은 컸다. 보도블록이 많아 초반부터 다리에 무리가 갔다. 오늘은 왼쪽보다 오른쪽 다리가 더 아팠다. 최대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걸어보려 하지만, 어쩐 일이지 잘 되지가 않았다. 등산스틱에 되도록 의지했다. 촉이 다 닳은들 웬만한 스틱의 기능을 하긴 한다.

241022_A1_013(edit2)(resize2).jpg <밤인 새벽을 건너 스르륵 아침으로>

안내 표식이 눈에 잘 띄지 않아 GPS에 의지해야 했다. 유속이 빠른 강을 건넜고, 철길을 따라 고가도로를 넘었다. 점점이 멀어지는 주홍빛 가로등이 비로소 헤어짐을 고하는 듯했다. 어느덧 작은 마을을 거치며 대도시를 빠져 변두리로 나간다. 넓은 도로의 소란 아래 거대한 가건물들, 무덤 같은 창고 곁을 여럿 지난다. 이른 아침부터 빵 공장이 분주하다. 따스히 흘러나오는 그 냄새가 포근했다. 대체로 아직 도시의 길이었고, 멀어진 줄 알았던 가로등은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이제 어스름까지 틔여 해드랜턴은 아예 필요가 없었다. 시야가 넓어졌지만 풍경은 볼 품도 없이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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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구름 빛>

7시 40분, 두 번째 마을 La Virgen del Camino. 건너편에 한 hostal bar가 보였다. 배도 고프겠다 길을 건너 가게로 들어섰다. 인기 있는 곳인지 현지인으로 아주 바글바글했다. 커피와 타파스를 합해 1.5유로밖에 안 해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같은 메뉴라도 동네마다 가게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그래, 여기에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알겠다. 덕분에 잘 먹고 간다. 20분을 쉬었다. 여러모로 힘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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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도로-마을>

바쁜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 구름은 많지만 맑은 하늘의 느낌이 있다. 정수리 위에 뜬 달은 어제보다 더 홀쭉해져 있었다. 맑고 고운 소리, 새들이 마음껏 지저귄다. 꾸물거리던 햇살도 어느새 확 비쳐왔다. 중간에 헷갈릴만한 갈림길이 있어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차들의 왕래가 많은 도로 옆을 걷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신은 산만했지만 그래도 딱딱한 골목보다는 간간히 만나는 이 흙길이 반가웠다.

241022_A1_040(edit2)(resize2).jpg <Mesón El Yantar bar>

9시 10분, 세 번째 마을 Valverde de la Virgen을 통과한다. 성당의 탑마다 야무지게도 새들이 집을 지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타닥타닥, 스틱 소리만 거리에 나긋이 울렸다. 햇살이 더 진해졌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덩덜아 조금은 경쾌해졌다. 십여 분을 걸었나, 그리 멀지 않은 네 번째 마을 San Miguel del Camino에 도착했다. 여기 문 연 bar가 있었다. 쉴 겸 망설이지도 않고 들어가 두 번째 아침을 먹고 간다. 어느덧 산티아고까지 남은 세 자리 킬로수의 앞자리가 3에서 2로 바뀌어 있었다.

241022_A1_066(edit2)(resize2).jpg <좋아하는 빛깔이 길에 있었다>

11시 20분, 다섯 번째 마을 Villadangos del Páramo를 지난다. 여기서 또 쉬어가려고 했는데, 초입에 있던 bar를 그냥 지나쳤더니 더 이상 문 연 곳이 없었다. 다행히 마을을 빠져나가는 작은 숲길에 벤치가 하나 있었다. 세요(sello)와 커피는 없지만, 아쉬운 대로 여기 앉아 혼자 도란도란 잠시 숨을 돌린다. 작은 새가 포로롱 날아와 곁에서 서성댔다. 넉넉한 나무숲을 보고 있자니 기분도 한결 가벼워진다. 다리가 잘 버티고 있었다. 장하다 대견하다, 아끼지 않고 마구마구 칭찬해 줬다. 이제 4km 정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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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옥수수밭-마을>

넓은 옥수수밭 도로를 걸어 남은 길을 마저 이었다. 도로 곁을 따르는 걸음은 쉬웠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2시 반, 오늘의 목적지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ín del Camino)에 도착했다. 예약한 알베르게는 마을의 초입에 바로 있었다. 이른 체크인이 가능해 좋았다. 마당엔 수영장도 있어 느긋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해가 쨍해 빨래가 아주 잘 마를 것 같았다. 시설이 상당히 깔끔했다. 덩달아 마음도 편했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곧장 마을을 구경했다. 크게 볼거리는 없는 작은 동네였다. 씨에스타 직전의 슈퍼에 들러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근처의 bar에서 생맥주도 한 잔 마셨다. 햇살이 강해 장면만 보면 꼭 한여름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공기가 마냥 뜨겁지는 않아 가만히 앉아 있자면 살짝 추울 정도였다. 가을이긴 가을이다. 하긴 10월도 다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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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Martín del Camino 마을과 오늘의 숙소>

돌아온 알베르게엔 낯익은 분들이 몇 계셨다. 그들과 늦은 저녁까지 어쩌다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도 아쉬워 각자의 음료를 한 잔씩 더 했다. 트레킹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새로운 이야기와 공통된 관심사가 적절히 뒤섞여 유쾌한 자리가 됐다.


마셔봐야지 마셔봐야지 하면서 미루고 미뤘던 깔리무초를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시켜봤는데, 오! 맛이 상당히 괜찮다. 그만 마음에 쏙 들고 말았다. 사실 별건 아니었다. 얼음에 레몬, 와인에 콜라를 섞은 간단한 음료였다. 주로 스페인 북쪽 지역인 바스크 지방에서 마시는 혼합주란다. 원래는 질 나쁜 와인을 최대한 맛있게 먹기 위해 시도된 건데, 이제는 하나의 문화처럼 남아버렸다나 뭐라나. 와인과 탄산수를 섞어마시는 틴토 데 베라노(Tinto de Verano)의 콜라 버전쯤 된다. 아님 역사가 좀 더 깊은 잭콕의 과실주 동생쯤이랄까. 어쨌든 이 날 이후의 순례길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된다. 한마디로 '꽂혔다'.


어쩌다 보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긴 만남을 가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해서인지, 괜스레 숨 가쁜 느낌이 들었다. 느닷없는 느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제때 일어날 자신이 별로 없었다. 오늘의 긴 걸음에도 다리는 의외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동키 없이 걸어가 볼까 싶다. 물론 걱정은 되나 미리 골치 아파하지는 않기로. 눈을 감았다. 또 기절각이다. 아무런 꿈도 없이 어둠에 휘감겼다.



2024.10.22.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3일 차(누적거리 485.61km)

오늘 하루 41,001보(27.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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