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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빛이 나니 힘이 나네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1일 차

by 달여리
엘부르고라네로~만시야데라스물라스(≈18.72km)


웬일인지 이른 새벽부터 분주한 알베르게였다. 그 부산스러움에 절로 눈이 떠졌다. 여기서 37km 떨어진 레온(León)까지 한 번에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꽤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장한 표정들, 마치 그런 분위기로 만연했다. 안 그래도 어제 대화를 나눈 두 여성 한국인 순례자 중 한 분께서 오늘 그리 가신다고 하셨다. 우와, 감탄과 동시에 고개가 절레절레. 다리가 성한들 도무지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나는 딱 그 반인 18km 정도만 걸어갈 거다. 역시 오늘도 배낭은 동키로 보낸다.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마다 따스한 포옹을 나누어주시는 알베르게 호스트 덕에 아침의 부엔까미노(Buen Camino)는 밝고 활기찼다. 기분 좋은 하루의 첫걸음이었다. 7시 20분 즈음 출발했다. 아직 바깥은 밤처럼 어두웠다. 마을의 마지막 가로등을 지나 헤드랜턴을 켰다.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 흐린 하루가 예상됐다. 어둠의 묘지를 지나 도로 옆 흙길을 따라 걸었다. 적막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지나가는 차조차 한 대 없었다.


날이 점점 밝아온다. 아니, 밝아온다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흐렸다. 시야를 가로막은 듯한 검은 숲을 얕게 통과했다. 길에서 벗어난 곳에 멀찌감치 한 마을이 보였지만 귀찮아 그냥 지나쳤다. 배가 고팠지만 아침 식사는 다음 마을로 미뤘다. 견과류와 사과로 급한 허기를 먼저 달랬다. 종종 마주치는 벤치에 앉아 살짝씩만 쉬었다 간다.


어젯밤은 다리 통증으로 깨거나 그러진 않았다. 여전히 아프긴 했지만 어제보다는 덜한 것 같기도 했다. 레온부터는 동키 없이 배낭을 메고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온전한 걸음은 아니지만, 확실히 아주 조금은 나아진 게 분명했다.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견뎠더니 자연 치유가 되고 있긴 한가보다. 미련의 힘인가, 아니면 꾸준히 바른 안티푸라민의 힘인가.

<아침이 밝은 게 맞다>

오늘이 어제인가 싶을 정도로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길이 반복됐다. 빈 밭, 도로, 철길, 플라타너스. 날씨마저 똑같았다. 적막을 깨고 한 번씩 기차가 쌩 훑어갔다. 저기 내 배낭도 들어있을까, 이따금 동키 서비스 차량이 쏜살같이 지나가곤 했다. 햇빛의 낌새를 기대하며 연신 뒤로 돌아봤지만 풍경엔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마지막 마을 Reliegos에 도착했다. 10시 15분, 마침 만난 문 연 bar에서 하몽 타파스와 커피로 늦은 아침을 해결했다. 맛은 없었지만 배는 찼다. 파리가 많이 날려 불편했다. 그래도 20분을 꽉꽉 채워 쉬어간다.


텅 빈 이 마을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괜스레 골목을 구석구석 기웃거려도 봤다. 구글지도상 평점 5점인 bar가 있길래 기대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통을 채웠다. 세요(sello)도 받을 겸 작은 슈퍼에 들러 사과도 하나 샀다. 잔뜩 떨어진 밤을 괜히 몇 개 주워 본다. 어슬렁어슬렁 나무 아래와 담벼락 곁을 자세히 살펴보듯 걸었다. 어떤 무늬들이 있고 제각기 그 뉘앙스가 있었다.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뒤돌아 보니 형형색색의 그룹이 멀리서부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들려오는 건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한국말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몸을 숨기듯 숨을 죽였다. 가이드까지 대동하신 한국 어르신들의 단체였다. 쌩쌩하신 분, 힘겨워 보이시는 분, 이리저리 열심히 사진을 찍으시는 분, 팝송을 큰 볼륨으로 틀어놓고 가시는 분, 요란한 대화를 나누시는 분들... 가지각색의 점퍼처럼 걸음새는 모두 다 달랐다. 멀찌감치 떨어져 덕분에 한 템포 쉬어간다. 헛헛한 풍경에도 쉴만한 벤치는 의외로 많았다.

<오늘도 흐린 길>

무슨 차이일까, 옥수수밭이 한쪽은 싱그러운 초록 반대쪽은 메마른 갈색이었다. 송전탑 아래를 지날 땐 지릿지릿 고압전선에서 무서운 소리가 났다. 뭐랄까 하여간 지루한 길이었다. 찌푸린 날씨는 지긋지긋한 마음을 더없이 부추겼다. 무거운 배낭이 없으니 몸은 별반 힘들지 않았다. (그런들 피곤하다.) 다리도 이만하면 며칠 전에 비해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프긴 아팠다)


고가도로를 건너자 마을로 들어선다. 12시 5분, 오늘의 목적지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에 벌써 도착했다. 예약해 둔 알베르게는 1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동네를 편한 마음으로 구경했다. 마을이 기대보다 컸다. 초입에 만들어진 고퀄의 벽화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Mansilla de Las Mulas 동네 구경>

성당에 들어가 나직한 음악을 들었다. 잠시 앉아 있자니 곧 미사가 시작되려는 듯 갑자기 분주한 분위기가 된다. 삼삼오오 마을사람들이 모여드는 통에 슬그머니 성당을 빠져나왔다. 미사에 참여할 만큼의 에너지가 당장에 없었다. 아니, 뭐라도 먹자. 근처에 보인 카페로 아무렇게나 들어가 커피와 빵을 시켰다. 와... 근데 만만해서 시킨 패스트리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맛있는 게 아닌가. 굳이 스페인어까지 검색해 “에스타 무이 델리시오소(매우 맛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며 엄지를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무뚝뚝해 보이던 주인장 어르신도 활짝 웃음을 내어주신다. 맛있는 빵에 더해 황금빛 미소까지. 순간 뜻밖의 행복감을 느꼈다.

<총알 자국은 아니겠지? Mansilla de Las Mulas>

부엔까미노앱 최고 평점이라는 이 알베르게를 어제 왓츠앱으로 연락해 미리 예약해두길 잘했지. 침대가 꽉 찼다는 안내문이 문 앞에 붙어져 있었다. 1시에 바로 체크인을 했다. 가정집 분위기의 아늑함이 단박에 편했다. 겨우 이층 침대 4개씩 방 2개가 전부였다. 성씨가 아닌 이름을 정겨운 말투로 계속 불러주니 왠지 더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뒷마당까지 있어 좁은 공간에 비해 충분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빨래를 너는데 웬걸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허허허, 다리를 뻗고 뒷마당에 앉아 얼마간 여유를 누렸다. 빛이 가득하니 없던 힘도 난다. 그 여세를 몰아 동네 산책을 잠시 즐겼다. 하루 종일 날이 흐렸어도, 이 햇살이 하루의 인상을 결정했다. 노랗고 짙었다.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뒤늦은 햇빛이 오늘을 갈무리한다.

<하루의 끝, 다시 햇빛 산책>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다 슬금슬금 저녁을 맞이한다. 낮에 잠시 산책하며 들렀던 Torre Albarrana 성곽전망대로 다시 한번 찾아간다. 석양이 보고 싶어 귀찮음을 무릅썼다. 느릿느릿 골목으로 다가서며 늦오후의 빛과 그림자를 마음껏 만끽했다. 계단을 올라 탁 트인 시야에 잠시 몸을 기댔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마냥 환했던 태양이 어느새 마을 너머로 은은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선명하고 맑게 하루가 뒤로 넘어간다. 마을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천천히 암전했다.


내일은 대도시 레온으로 간다. 규모로 치면 프랑스길에서 만나는 도시 중 네 번째로 크다. 많은 순례자들이 여기서 연박을 한다는데, 늘 그랬듯 나는 그러지 않을 거였다. 역시 동키를 예정했다. 동키를 위한 목적지 호스텔도 이미 예약을 마쳤다. 대도시니 뭐라도 맛있는 게 많겠지, 쩝쩝 입맛을 다셨다. 한의원이고 뭐고 일단은 모르겠고, 내일은 도착하면 맛있는 거나 실컷 먹어야겠다 했다. 그런 꿈을 품고 꿈나라로 일찍이 들련다. 다들 자려는 분위기라 동의를 구한 뒤 탁 불을 껐다.



2024.10.20.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1일 차(누적거리 442.56km)

오늘 하루 39,536보(26.6km)







*오늘부터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로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b권은 21일 차부터 40일 차 완주까지 총 23화입니다.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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