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4일 차
글렌다락유스호스텔~글렌멜류어(≈15km)
10시가 채 되기도 전에 잠들었는데, 7시 알람에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푹 잔 걸까, 매트리스 탓인지 등이 뻐근했다. 바깥엔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곤히 잠든 룸메이트들을 피해 우선 로비로 나갔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깨웠다. 고요한 숙소에 비 오는 소리만 가득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조심조심 나설 채비를 마쳤다. 세수를 하고 필요한 짐만 챙겨 나왔다. 다 찌그러진 컵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창밖을 계속 노려봤지만 날씨는 바뀔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다려봤자 소용없을 텐데도 선뜻 발이 안 떨어졌다. 어쩌겠어, 결국 9시 10분께 숙소를 출발했다.
무거운 배낭이 없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마실 나서듯 그리 길을 걸었다. 글렌다락 방문객 센터(Glendalough Visitor Centre)를 지나 숲길로 든다. 잘 닦인 공원 느낌. 냇물 위로 비가 추적추적 떨어졌다. 강 따라 어제 본 모나스틱 시티(Monastic City) 유적이 드러났다 사라진다. 길을 살짝 내려 글렌다락의 어퍼레이크(Upper Lake)도 감상했다. 먼발치의 폭포와 눈앞의 호수. 새소리와 빗소리가 어우러져 운치가 있었다. 모든 소리를 머금은 듯 먹먹한 고요가 풍경에 젖어 있었다. 잠시 멎었다. 비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앉아 있고 싶었다.
9시 50분, Poulanass Waterfall을 따라 길을 오른다. 작은 폭포인데도 제법 귀를 울렸다. 몇 마리의 파리가 자꾸 길을 괴롭혔다. 비가 오는데도 이렇게 날아다니는 걸 보면 제법 극성인 녀석들인가 보다. 아니면 몸에서 쉰 내라도 나는 걸까. 계속 오르막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이 산을 넘을 건가 보다. 평지도 있었지만 대체로 계속된 오르막이었다.
10시 반. 슬슬 비가 그치려는 모양이다. 산 안개가 피어올라 사방으로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금씩 길이 더뎌진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우비를 벗어 가방에 대충 걸쳤다. 몸이 부쩍 달아올라 뜨겁고 더웠다. 간혹 달콤한 바람이 불어왔다. 중간중간 핸드폰이 먹통인 구간이 많았다. 오르막도 오르막인데 맞은 비에 몸이 무거웠다. 마실의 가벼운 마음은 진즉에 사라지고 없었다. 15kg의 모든 짐을 짊어진 상태였다면 고됐을게 분명했다. 연박에 콜택시는 우여곡절 속의 전화위복이 확실했다.
11시 20분, 드디어 도착한 언덕의 입구. 뮬라코어(Mullacor)라 불리는 이 산의 정상부근이다. 다시 비가 좀 내린다. 이제 오르막은 다 오른 듯했다. 양들의 출입을 막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무데크 외길을 따라 언덕이 이어졌다. 이것은 비인가 바람인가 안개인가 연기인가, 온몸을 쓸어 담는 공기가 이 장소를 말해주고 있었다. 비바람에 흔들리며 그저 감탄할 뿐 그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5분이면 족할 이 짧은 능선 길에 느릿느릿 20분이나 머물렀다. 뭔가 제주의 오름 같았다. 아일랜드에서 자꾸만 제주를 보게 된다. 그만큼 닮아 있는 분위기가 있다. 비바람이 이토록 세지만 않았다면, 아예 데크 통째로 앉아 여유를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머리가 아플 만큼 추웠다. 우비로 몸을 꽁꽁 싸매고 겨우 20분을 참아선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였다.
이 언덕 풍경이 오늘 길의 하이라이트였다. 이제 하산만이 남았다. 본의 아니게 양떼 몰이를 하게 되는 길이었다. 원래부터 그들의 터전. 그러니 지나며 연신 사과를 하게 됐다. 위클로웨이 이튿날 카레라이스로 포식했던 라운드우드 마을에서 장을 충분히 봐뒀다. 그때 산 에너지바가 걸음용 간식으로 딱이었다. 비 온 탓에 군데군데 흙탕물 냇물이 흘렀다. 마실 순 없겠지만, 비와 땀이 섞여 자꾸만 끈적해지는 손을 씻는 용도로는 충분했다. 이래저래 만족스러운 하산길이었다. 하늘마저 개며 드문드문 파란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Mullacor Hut’이라 적힌 비박용 브러셔 갭 헛을 지난다. 장작의 흔적과 남겨진 과일이 눈에 띈다. 만약에, 진짜 진짜 만약에, 기어코 숙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바로 여기서 비박을 했어야 했다. 밤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니면 우연한 동행이라도 생겼을까. 호기심이 일면서도 살짝 소름이 돋았다. 어둠의 숲속에서 마치 미지의 울음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오싹한 등줄기, 서둘러 Mullacor Hut을 떠났다.
풍경 저 아래로 글렌멜류어(Glenmalure)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막 12시가 넘었을 뿐인데 거진 길을 다 걸어온 모양이었다. 일부러 더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택시와 약속한 시간이 오후 3시라 어차피 시간이 남아돌았다. 폭포의 풍경을 지나, 벌목 길을 지나, 숲을 지나, 이윽고 도로로 나온다. 그 도로를 따라 겨우 5분 남짓, 한적한 거리 위로 덩그라니 선 글렌멜류어롯지 앞에 도착했다. 종점이었다. 오후 1시 10분, 오늘의 길은 그렇게 홀라당 끝이 났다.
두 차례나 이메일로 물었지만 결국 방이 없다는 대답만 받았던 글렌멜류어롯지는 식당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바깥의 한산한 분위기와 다르게 내부의 Bar는 놀랄 만큼 사람들로 북적였다. 택시를 기다리며 기네스의 여유를 즐겼다. 오랫동안 핸드폰이 안 터져 답답했는데 여긴 와이파이가 빵빵했다. 잘됐다. 한국에 있는 아내와 통화도 하고, 이런저런 정보검색도 하고 그랬다. 쉴 때는 걸을 때보다 어쩐지 시간이 쏜살같다. 오후 3시는 금방이었다. 맥주 한 잔에도 적당히 얼큰했다.
택시는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백발의 친절한 노신사분이셨다. 가까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먼 거리를 간다. 15~20분 정도는 족히 달린 것 같다. 좁은 길도 이리저리 잘 빠져나오신다. 베테랑의 운전 덕에 무사히-편한히 숙소로 잘 돌아왔다. 내일 아침 8시 45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악수까지하며 기분좋게 헤어졌다. 어쩐지 든든한 마음이었다. 여러모로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와 보니 어제 빤 빨래들이 아직도 안 말랐다. 아무래도 빛이 잘 들지 않아 숙소 내부가 습한 편인 듯했다. 고민 끝에 오늘 입은 옷들은 빨지 않기로 했다. 하루쯤은 괜찮겠지 뭐, 잘 털어서 한번 견뎌보기로 했다. 앞선 여행동안 빨래가 마르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이어질 도보여행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거라 충분히 예측이 가능했다. 그러니 깔끔을 떨고자 하는 고집은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이 그 첫 시험 무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빨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궁금했다. 누구라도 빤 옷가지를 말리는 걸 도통 보지 못했다. 유료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을 때만 세탁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계속 입는 걸까.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실례가 될까 그러지 못했다. 하긴 그럴 만큼 친분 쌓인 사람이 있을 턱도 없지만.
씻고 로비로 나와 커피를 타마셨다. 일과를 마치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쉬면서도 저녁은 늘 바쁘다. 매일의 로고를 그리고(기록의 하단마다 붙는 작은 그림이 바로 ‘매일의 로고-매일노고’다. 하루의 인상을 담는 작은 그림에 로고란 명칭을 붙였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사진 파일을 모두 외장하드로 정리하고, 하루치의 글을 쓴다. 갖가지 충전도 제때제때 해놓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위클로웨이 다음의 일정을 준비하고 또 계획해야 한다. 이제 3일밖에 안 남았다. 앞으로는 더 이상 숙소 문제가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해 둔다.
흐렸던 글렌다락에 햇빛이 났다. 빛도 쬘 겸 다섯 시 반 숙소를 나섰다. 근방을 아무렇게나 산책했다. 흐르는 천도 보고 느긋한 노루도 보고 알록달록 유적 관람객들도 구경했다. 하늘이 파라니 덩달아 상쾌했다. 돌아오는 길에 푸드트럭에서 식사라도 할까 했는데 걷고 온 사이 벌써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네, 그럼 오늘 저녁은 짜장라면으로! 더블린에서 라면을 잔뜩 사 오길 참 잘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라면은 이럴 때 정말로 최고다. 위클로웨이가 끝난 뒤 더블린으로 돌아가면 CTC를 대비해 라면을 더 사둬야겠다. 그 한인마트엔 종류도 많다.
내일은 두 개의 언덕을 넘어가는 무려 22km 길이의 먼 길이다. 고난이 이미 눈에 선했다. 배낭의 무게에 허덕이며 헛웃음을 짓고 있을 게 뻔하다. 도대체 왜 걷고 싶었을까. 그건 걷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냥.
그러니까 내일도 고민 말고 '그냥' 걷자. 그러기 위해선 역시나 오늘도 푹 자자. 내일은 내일에게. 지금은 오롯이 휴식을. 잠을, 그런 평온의 밤을.
2024.08.27.
걷기, 위클로웨이 4/7
27,517보(21.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