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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여행자 A와의 만남

조지아를 가자고요?

by 담아

출국날 당일, 오랜 프랑스 유학생활동안 늘 제2 공항만을 사용하다가 오랜만에 방문한 제1 공항.


편도 티켓만 끊고 나온 무기한 여행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간소한 배낭과 에코백, 작은 크로스백만이 내 짐의 전부였다. 내 여행은 사진과 추억을 남기기 위한 목적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목표였기에 대부분의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덜어냈고, 나 역시 스스로가 어떤 곳을 방문해서 얼마나 머물다 올지 감조차 안 오는 만큼 이동에 큰 무리가 없도록 꼭 필요한 짐만 챙겼다.


처음보다 아주 조금 더 구체화된 내 여행의 계획이라면, 튀르키예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들어가서 열기구가 유명한 카파도키아를 방문한 후, 그곳으로부터 서쪽에 위치한 그리스를 통해 동유럽을 차근차근 올라가며 북유럽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이번 나의 여행은 대부분을 홀로 거닐 작정이었으며, 이름도 생소한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의 행선지들은 애초에 여행객이 적을 것으로 생각해 누군가와 함께 다닐 일이 거의 없을 터였다.


다만 그래서, 비교적 여행자가 많은 초반 여행지인 튀르키예와 그리스에서는 동행을 구해 같이 다녀 볼 예정이었다. 본래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가끔은 나와 가까운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도 완전한 타인을 만나 내 사연을 푸는 게 더 속이 후련할 때가 있으니깐. 어차피 그곳들만 지나면 앞으로의 여행에 지겹게 혼자 있게 될 것을 예상하여 이미 이스탄불의 동행은 구해둔 터였다.




평소 장거리 비행을 무척이나 싫어하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생각보다 수월함이 느껴졌다. 약간의 슬픈 감정과 더불어 이렇게 떠나는 게 맞나 싶은 복잡한 감정은 한편에 늘 박혀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지친 마음을 쉬게 하고 오겠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적어도 이번 여행에 있어 부담감과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내겐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며 별 다른 피로감 없이 도착한 이스탄불 공항.


숙소에 가던 길 보았던 풍경


짐을 찾고 별로 어렵지 않은 수속을 마친 뒤, 공항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이스탄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탁심광장. 내 숙소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걸어서도 갈 수 있었고, 도착한 숙소는 생각보다 넓고 깔끔한 데다 거실과 침실도 구분되어 있어 편안한 느낌이 확 드는 만큼 시작이 좋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계획한 것 중 하나가 무조건 혼자서 숙소를 쓰기로 계획했는데, 일단 잠이 워낙 예민하기도 한 데다 심신이 많이 지쳤다고 느끼는 만큼 스스로에게 홀로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간단히 짐을 풀고, 동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스탄불 현대 미술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도시를 구경했다. 조금은 어수선한 느낌이 있지만,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리의 모습과 마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 아마 이때부터 내가 한국을 떠나왔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괜스레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내가 지금 이 거리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온갖 슬픔에 잠겨 일상을 꾸역꾸역 소화해내고 있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서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곳을 걸을 수 있다니!


이국적인 이 풍경은 왠지 모르게 내 맘을 편안히 만들어주었다


물론 이미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어떠한 연락조차 확인하지 않던 나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묻는 안부가 계속 쌓이고 있음을 알긴 했지만, 그에 대한 미안함의 감정보다도 지금은 현재의 내 모습에 더 집중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그 마음들 조차 아직 내겐 너무 버겁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나를 복잡하게 만드는 생각에서 벗어나 30분쯤 기분 좋게 걷고 난 뒤, 이미 어둠이 깔린 부둣가 근처에서 만난 여행자 A. 저녁 식사시간을 애매하게 넘은 시간이라 간단히 맥주 한잔 하기로 방문한 펍에서야 각자의 소개를 할 수 있었다.


A는 6개월간의 세계여행 중이었고, 이미 2개월이 흐른 상태에서 튀르키예에 도착했단다. 타지에 나옴으로써 나를 힘들게 하던 모든 상황에서 도망친 후 처음 만난 새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잠깐의 대화를 통해 사람 자체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우리는 일면식도, 서로에 대한 단 하나의 정보도 없던 첫 만남이었음에도 다양한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그 역시 나와의 대화를 즐겁게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장기여행이다 보니 큰 계획은 있되, 세부 계획은 그때그때에 따라 조정하는 A. 그는 튀르키예 여행을 마치고 난 뒤엔 다음 여행지로 조지아를 생각 중이라 했다. 나는 사실 그 나라에 대한 정보도, 어디 붙어있는지조차도 잘 몰랐지만, 마침 떠나기 전 날 여행사이트에 누군가가 올린 조지아의 아름다운 사진을 우연히 하나 봤었기에 적당한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 들어온 A의 조지아 동행제안.


"담아, 나랑 조지아 가지 않을래요?"


"조지아를 가자고요?? 나도 같이?"


"어차피 계획도, 다음 목적지도 불분명한 여행이라면서요. 그곳이 그렇게 예쁘다는데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이 여행을 오며 잡아둔 일정이라곤 이스탄불 편도행 티켓과 숙소 2박 3일의 예약이 다였다. 물론 나름의 큰 계획을 구상해 오긴 했으나,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내가 원한다면 그곳을 가기에 어떤 문제도 없는 건 사실이었다. 다만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내 앞으로의 예상 여행지는 모두 서쪽에 위치해 있고, 조지아는 완전히 반대인 동쪽에 위치한 나라.


오늘의 대화가 즐겁긴 했지만 A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는 데다, 당장 3일간의 이스탄불 동행이 있던 만큼 일단 함께 이곳을 둘러보며 생각을 해보자는 얘기를 전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할 뿐, 사실 난 이 대화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예상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A의 돌발적인 제안은 이미 내 모험심을 자극하고 있던 데다가 어차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내 여행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그보다 더 재밌는 상황은 없을 것 같았기에.


여행의 첫날. 가뜩이나 부실한 나의 여행계획조차 완전히 무너질 위기지만, 하지만 나 역시 A와 함께 다니면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여행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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