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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Jan 23. 2021

슈퍼우먼? 그게 뭔데?

자존심 말고 자존감

2년 전, 두통과 어지러움에 시달린 적이 있다. 종종 잔병치레는 했어도 큰 질병 없이 살았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시력에 맞지 않는 안경을 썼을 때처럼 시야가 뿌옇게 변하면서 어지러웠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도 찾아왔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푹 자고 나면 나아질 줄 알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났는데도 두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진통제를 먹어도 약발이 떨어질 때면 다시 나를 괴롭혔다. 동네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감기는 아닌데, 이렇다 할 원인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진통제 몇 알을 처방해주면서 통증이 계속되면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두통과 어지러움이 괴롭힐 때마다 진통제를 털어 넣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약으로도 잡히지 않는 증상에 살짝 겁이 났다. 도대체 뭐가 문제이길래…. 결국 3차 병원에 진료를 예약했다. 진료 시간보다 일찍 병원에 도착해 간단한 검사를 받고 담당 의사를 만났다. 두통과 어지러움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증상은 어떤지, 진통제를 먹고 나서 얼마 후에 다시 통증이 느껴지는지, 평소 생활 습관은 어떤지를 물었다. 검사 결과가 나와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면서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시간이 왜 그리 안 가던지. 다시 마주 앉은 의사는 검사상 소견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불안감, 만성 피로가 누적돼 나타나는 일종의 스트레스성 증세로 판단했다. 쉬면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며 처방전을 내밀었다. 석 달 치 영양제만 잔뜩 받아들고 돌아왔다.

 


큰 병이 아니라고 하니 안심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인터넷 검색창을 열어 증상을 입력했다. 두통과 어지러움은 여러 질병의 증상 중 하나였다. 어떤 병명을 갖다 붙여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랄까. 그중 ‘슈퍼우먼 증후군’이 가장 그럴듯했다. 여성들이 주부의 역할과 직장에서의 역할을 모두 잘 해내려고 하는, 모든 일에 너무 완벽해지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지쳐서 나타나는 증상을 가리켰다.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직장 여성에게 흔히 나타나는 스트레스성 증상이란다. 나는 슈퍼우먼 흉내를 내고 있었다.


 




좋은 엄마, 능력 있는 직장인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일하느라 아이에게 소홀하고 아이를 돌보느라 일은 뒷전이라는, 직장맘을 향한 부정적인 프레임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색안경을 끼고 직장맘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것 봐, 잘하고 있지?’ 보란 듯이 해내고 싶었다.

 


문제는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터졌다. 회의 시간, 각자 아이템을 두고 기삿거리가 될지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서로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듣기 싫은 소리에 파르르 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이템이 왜 별로인지를 짚어내는 말들이 나에 대한 평가로 들렸다. 평소 같았으면, 기존 아이템에 대한 접근을 달리하거나 다른 아이템을 고민하면서 방법을 찾았을 텐데, 다른 사람의 지적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퇴근 후에는 내가 정해둔 ‘엄마의 규칙’을 따르느라 숨이 찼다. 하루에 한 끼는 꼭 직접 요리할 것, 사용한 그릇은 바로 설거지할 것, 집은 정돈된 상태를 유지할 것, 빨래는 그때그때 세탁할 것. 끝없이 해야 할 일을 부여했다. 마치 이런 것쯤은 척척 해내야 좋은 엄마인 것처럼.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누군가 내게 ‘직장맘이 뭐 별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흔히 자존심과 자존감을 비슷한 의미로 오해한다. 나도 그랬다. 타인의 비판과 부정적인 평가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것이 자존감이라고 생각했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나는 나야!’ 하면서 말이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다. 여기서 ‘남에게’라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타인과 외부 요인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자존심만 내세우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아쉬운 부분을 지적하고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해보라는 타인의 조언도 공격의 화살로 비칠 뿐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전미경 원장은 저서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에서 자존감을 ‘나의 내면적 가치에 집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내가 잘하는 역할, 세상에 똑같은 엄마의 모습은 없다. 흔히 ‘좋은 엄마’라고 할 때 상상되는 어떤 이미지는 있겠지만, 그 이미지와 같은 역할을 못 한다고 해서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좋은 엄마 되기를 강요하지 마’ ‘엄마 역할은 내 진짜 모습이 아니야’라고 부정적인 방어막을 칠 필요도 없다. 전자의 경우나 후자의 경우나 똑같이 자기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핵심은 ‘내가 되고 싶은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잘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엄마라는 역할에 잘 맞는 나만의 가면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자존감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중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직장인의 모습, 내가 잘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해 집중하는 것. 이를 실천할 때는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부족함과 한계를 깨닫고 좌절하기보다 강점과 가능성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충고와 조언도 한 단계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 스스로 용기도 북돋웠다. 일하는 엄마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이다. 슈퍼우먼? 그건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캐릭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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