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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렌시아 Jul 24. 2024

<파리대왕> 인간 악의 평범성

철학 공부 에세이

이성과 야성

문화라는 가면과 야만성이라는 본성


랠프와 잭의 대립 구도

문명과 본성의 갈등 구조


평범하던 아이들조차 어른이 없는 무인도 섬에서는 야만성을 드러낸다. 그곳은 생존의 공간이다. 방향을 제시해 주는 어른은 없다.

오로지 같은 또래의 아이들, 그 에서 힘의 구도가 형성된다.


처음엔 인간 문화와 이성의 영역을 대표하는 금발의 랠프에게 아이들은 마음이 간다. 랠프는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소라도 가지고 있다. 멀리서도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모일 수 있었다. 나팔 같은 기능을 하는 그 소라. 소라는 마치 스피커 같다. 문명의 힘처럼 뭔가 있어 보인다. 아이들은 조용하지만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말을 하는, 또한 모든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소라를 불 줄 아는 랠프를 대장으로 뽑는다.

 

랠프의 라이벌은 잭이다. 잭은 자신이 대장이 되고 싶었으나 아이들이 다수결로 랠프를 뽑았었기에 그 결정을 수용한다. 민주주의의 원칙인 다수결의 원칙을, 문화 시민의 교육은 받은 학생답게 잘 수용한다.


하지만, 잭은 섬에서의 생활 내내 랠프와 다른 입장에 선다. 비행기가 불시착하며 섬에 갇히게 된 아이들. 조난 당한 섬에서 탈출할 방법이 봉화를 잘 피우는 것이라 생각하는 랠프와 짐승 사냥을 하고 싶어 하는 잭은 계속 갈등을 하게 된다.


둘 다 맞는 방법 같으나, 무엇에 더 중요도를 주느냐가 선택이다. 봉화 1순위, 사냥 2순위이냐. 사냥 1순위, 봉화 2순위냐.

리얼 생존 상황이 이 아이들에 벌어진 것이다.

 

처음엔 힘의 구도가 소라를 지닌, 정당하게 대표로 뽑힌 랠프에게 있었다. 하지만, 섬에서의 생활이 길어지고 맛있는 고기의 맛을 보게 되며 힘의 구도는 잭 쪽으로 기운다. 강한 힘으로 동물을 사냥해 입에 먹을 것을 넣게 해 주는 잭.


아이임에도 아이들은 점점 야만성을 드러내게 된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을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되고, 폭력적인 그 행위 자체에 쾌감과 짜릿함, 희열을 느끼는 모습을 띠게 된다. 점점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 간다.


아이들이지만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것, 죽게 만드는 것, 그 모든 잔악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된다. 잭이 시키는 일이라면 그로 인한 앞으로의 일이 폭력적 결과라는 것이 예측됨에도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한다. 잭이 시키니까 그냥 한다. 


아이들만 는 생존 환경 속, 아이들은 야만성을 따라 하게 되고 나중엔 자신 안의 야만성에 놀라기도 하며, 또 나중에 자신이 스스로의 야만성에 도취되어 잔악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된다.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야만성

이 둘이 맞짱 뜬 상황, 이 섬에선 야만성이 이기는 상황이다.


구조가 되는 순간, 섬 밖으로 나가게 되는 상황이 되자, 야만성을 뒤로 숨기고 이성, 문명의 모습을 선택한다. 


파리대왕은 사냥으로 죽은 암퇘지 머리에 붙은 파란 파리 떼, 그 징그러운 모습을 말한다. 이 형상을 본떠 윌리엄 골딩은 소설 제목을 <파리대왕>으로 정했다.


파리들의 왕, 히브리어로 바알제붑으로 불리는 파리의 왕은 '악마의 대죄'인 '폭식'을 유도하는 장본인을 말한다고 한다.


마왕 '루시퍼'와 동일시되기도 하는 대악마의 의미도 갖는다고 한다.


결국, 파리대왕은 악의 상징이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살해당하는 사이먼이라는 아이가 이 암퇘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이 암퇘지는 사이먼에게 분명 얘기한다. 너희들이 사냥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고 말이다.


이 파리대왕은 단순히 사냥으로 죽임을 당한 짐승이 아니다. 사냥을 통해서는 결코 죽일 수 없는 악의 형상, 그것이다.

 

얼굴에 흙과 숯을 이용해 칠을 한 아이들,  칠이 가면의 구실을 한다. 아이들은 더 거리낌 없이 야만성을 드러내게 된다.


가면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있는 그대로 부담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본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아이들에게도 악이 있었다. 윌리엄 골딩은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벌이 꿀을 짓듯 인간은 악을 짓는다"


벌이 꿀을 짓는 것이 벌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듯 인간이 악을 짓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라는 말.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로 악은 평범하다.

누구나에게나, 다 악은 있다. 이 악의 모습은 사실 매우 평범하다. 겉으로 악의 모습을 뿜뿜 뿜는 게 아니다. 평범한 일반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에게 악은 있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해 경계를 하고 주의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악의 모습을 띨 수 있다.


이성의 합리성을 믿는 게 대세였던 시절 즈음, 1, 2차 세계 대전을 겪게 된 뒤엔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의 참상,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일으킨 인간.

그 인간에 대한 의문을 이 작품은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인간의 이성이 옳다고? 인간이 이성에 의해서만 합리적으로 세상을 운용한다고?


"아니, 아니지. 인간은 아이들조차도, 잔인함을 가지고 있어. 이게 인간, 우리의 모습이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윌리엄 골딩이 종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종교인이든 종교인이 아니든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회의에 충분히 수긍이 된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쓴 작품이 않은가.


아이들이 사냥하고 싶어한 짐승. 괴물.


괴물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인간 안에 있다.

인간의 야만성!

것이 곧 파리대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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