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스펙트럼

by 담은


스펙트럼은 빛을 굴절시켜, 그 안에 감춰져 있던 고유한 색을 드러나게 하는 투명하고 세모난 유리체이다.
그 삼각 유리에 햇빛이 닿을 때, 우리는 단일한 빛 속에 이렇게나 다양한 색이 숨어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남색, 보라색.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자신만의 무지갯빛을 품고 있다. 서로 다른 파장으로 어우러진 이 빛의 합이 결국 하나의 ‘빛’이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진 우리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그렇다면, 만약 그 유리를 우리의 마음에 비춘다면 어떨까.
우리의 마음 역시 하나의 감정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색과 결, 그리고 결핍으로 이루어진 무지갯빛이라는 걸 알게 되지 않을까. 분노 뒤에 슬픔이 숨어 있고, 말 없는 얼굴 뒤에 사랑이 숨어 있는 것처럼. 서운함이라는 감정도, 사실은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의 반짝이는 잔광일지도 모른다.


나는 우정을 믿어왔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 것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우정은 언제나 따뜻하고 변함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떤 날은 따뜻한 햇살 같다가, 어떤 날은 차가운 안개처럼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가 사라진 건 아니다.


나는 친구가 힘들어질 때, 연락이 뜸해질 때, 나를 멀리하는 듯한 기색을 느낄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나 혼자 마음을 쏟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이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무심코 나를 푸른빛으로 물들이기도 한다. 왜 아무 말 없이 멀어지는 걸까. 내가 다가가면 왜 자꾸 벽을 세우는 걸까.


그 마음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땐, 나 역시 상처받은 채로 한 발 물러서곤 했다. 서운함은 침묵을 낳고, 침묵은 오해를 만든다. 그 오해가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거리가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스스로에게 돌아온다.

‘그 친구는, 지금 얼마나 힘들까?’
‘도움을 요청할 힘조차 없는 건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친구의 침묵이 꼭 외면은 아니라는 걸.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픔을 견딘다. 누군가는 말로 토해내지만, 누군가는 조용히 그 고통 속으로 숨어든다. 고통 속의 침묵은 방어이고, 때론 구조요청이다. 어쩌면 친구는 지금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 터널 안에서 그는 말할 힘도, 연락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버티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여백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 우리는 종종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을까?’ 하고 서운해하지만, 사실 말하지 못하는 마음도 마음이라는 걸, 그 침묵조차 하나의 외침일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속으론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 대신 침묵을 택하는 이들도 있고, 웃음 뒤에 눈물을 감춘 사람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보는 마음이 먼저여야 한다.


우정은 어쩌면 그런 순간에도 마음을 열어두는 일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기보다는, 친구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두는 일. 말로 묻기보다, 눈빛으로 기다려주는 일.

'네 괜찮아질 때까지 나는 여기 있을게'


우정은 계절과 같다. 봄처럼 설레는 시작이 있고, 여름처럼 뜨거운 웃음이 있으며, 가을처럼 깊어지는 시간이 있고, 겨울처럼 멀어지는 날도 있다. 하지만 계절은 다시 돌아오듯, 마음도 다시 통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관계의 끝을 단정 짓지 않고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정이 가진 순리다.


모든 색은 하나의 빛에서 왔고, 그 모든 감정은 한 사람을 향한 진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스펙트럼의 유리를 통해 마음을 들여다본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운함 속에 숨어 있는 그리움을 어루만지며,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깊게 친구를 바라보려 한다.


우정은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다름을 끌어안는 용기다.

침묵을 오해하지 않는 믿음, 멀어진 거리를 받아들이는 마음. 언젠가 다시 마주할 그날을 기다리는 조용한 인내.

우정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함께 성장한다.

우정은 스펙트럼이다. 눈에 보이는 색 하나만으로는 결코 다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의 결. 어떤 날엔 밝고 환하지만, 어떤 날엔 어둡고 깊다. 그러나 그 모든 색이 모여서야 비로소 무지개가 되듯, 그런 다양한 마음들이 함께할 때 우정은 비로소 완전해진다. 그리고 나는 그 무지개를,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 그 찬란하고 투명했던 시간들을. 사라지지 않도록. 잊히지 않도록. 다음 비가 온 뒤에도 다시 만나기 위해, 나 또한 스펙트럼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유리가 되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을 비춰주고, 그 안의 다채로운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빛깔로 존재하고, 각자의 우정으로 이어진다. 언젠가 또다시 비가 온 후 뜨는 무지개처럼 다시 웃을 수 있기를. 오늘도 나만의 스펙트럼을 마음에 품는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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