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라는 행성을 읽는 시간.

by 담은

우리는 저마다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품고 살아간다. 한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춥고 시린 겨울이 있는가 하면, 찬란하게 부서지는 여름날의 햇살도 숨어있다. 수없이 많은 별이 뜨고 지며, 때로는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고 때로는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그 광활한 세계. 우리는 매일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 속에서 타인이라는 미지의 행성을 마주한다.


사람은 한 권의 낡은 책과 같다. 우리는 무심코 책을 집어 들 듯 타인을 마주한다. 표지의 디자인이 예쁘지 않다며 내려놓기도 하고,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못마땅해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 사람이라는 책의 첫 장을 넘겨보기도 전에 판결은 이미 내려졌다.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 '무례한 사람', 혹은 '읽을 가치가 없는 사람'.


그 판단의 속도는 흩날리는 벚꽃 잎이 바닥에 닿은 시간보다 빠르다. 찰나의 눈빛, 말투의 높낮이,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 같은 것들이 그 사람의 정의하는 전부가 되어버린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타인을 납작한 종이 인형처럼 만들어 서둘러 분류함에 넣는다. 그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모호함을 견디는 일은 언제나 고단하니까.


하지만 겉모습은 그저 표지에 불과하다. 낡고 해진 표지 속에 비단처럼 고운 문장이 숨어 있을 수 있고, 화려한 표지 속에 비명 같은 슬픔이 적혀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날 선 말투는 오늘 새벽 그가 겪어야 했던 차가운 계절 탓일지 모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집스러움 뒤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지난날의 절박한 생존 본능이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은 '현상'이라는 파도일 뿐, 그 파도를 일으킨 '바람'은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 불어온다. 그러니 겉모습만으로 누군가를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바다의 표면만 보고 심해의 온도를 짐작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가 타인을 단정 짓기 전에 멈춰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빙산의 아래쪽을 바라보는 '다정한 의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꼭 그의 문장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이해와 동의를 혼동하여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다. "저 사람을 이해하면 내가 지는 거야", "저런 행동을 어떻게 인정해?"라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이해는 동의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품을 가진 단어다.

나는 그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사람이 뱉어낸 가시 돋친 말에 내 마음이 베어 쓰라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왜 그런 가시나무가 되어야 했는지, 어떤 척박한 땅이 그 사람을 메마르게 했는지 '맥락'을 헤아려 볼 수는 있다.


그것은 마치 궂은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 옷을 젖게 만드는 비가 싫고, 우중충한 하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 지금 저 구름이 무거워서 비를 뿌리는구나"라고 비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이해다. 상대에게 호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편견'이라는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함이다. 판단은 본능처럼 튀어나오지만, 이해는 의지적으로 빚어내야 하는 그릇이다. 겉모습이라는 껍데기를 뚫고 그 사람의 본질에 닿기 위해서는 인내심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더 천천히 읽히는 책이길 바란다. 그리고 나 또한 타인이라는 책을 읽을 때, 성급히 덮어버리지 않는 독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비록 그 내용을 모두 수긍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가 써 내려간 치열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눈물로 얼룩진 행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당신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당신이 겪어온 계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거리 두기가 우리를 함께 사는 사회로 만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살아가고 겉모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입체적인 우주니까.

오늘도 나는 함부로 마침표를 찍으려던 손을 멈추고, 당신이라는 문장 위에 긴 여운의 말줄임표를 남겨둔다.

당신의 표지안에 당신을 온전히 읽어내기 위하여.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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