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세는 이유 (8)

by 담결

그 연락을 받고 나는 그 주 목요일에 과외를 마치고 오후 4시쯤 다시 병원을 찾아갔다.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겉보기에 한유진의 상태는 이전과 비슷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다친 부위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애쓰며 최대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한유진은 나를 보더니 파란색 노트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선배. 이건 지수랑 제가 중1 때 같이 썼던 교환일기예요. 이걸 한 번 가져가서 읽어봐요. 제가 쓴 거까지 전부 읽어도 상관없으니까.”

“이걸 왜 지금 나한테 주는데?”

“저번에 선배 이야기를 듣는데, 선배가 뭔가 지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서요. 가져갔는데 정 읽기 불편하면 안 읽고 저한테 돌려줘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한 번은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 얼른 노트를 받아 가방 안에 넣은 다음,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병원에 가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 일정도 없었다. 그냥 그 장소에 더 오래 있기가 불편해서 회피했을 뿐이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털썩 앉았다. 백팩을 내려놓고 나니 양쪽 어깨가 살짝 아팠다. 가방에 든 게 그렇게 많았던가. 가방 지퍼를 열고 파란 노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하지만 노트를 열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동생의 방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는 내가, 그 애의 단편을 감히 열어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한참을 노트 표지만 쳐다보다가, 이번 학기 강의 노트들 사이에 그 파란 노트를 끼워 넣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한유진의 행동력과 친화력이 내가 예측한 것보다 높다는 사실이었다. 병실 안 공기가 불편해서 내가 큰 의미 없이 내뱉었던 말을 한유진은 곧이곧대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나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학과 사무실에 들러서 중도 휴학을 하는 경우에 교직이수는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크게 불편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학교에 가야 하니까 말이다.


한유진에게 말한 대로, 나는 이번 방학 동안 김혁수 교수님 연구실에서 학부생 연구 참여 활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연구 참여는 듣기에 거창하지만 사실 별 건 아니다. 특히 수학과처럼 실험을 하지 않는 학과에서는 더욱 그렇다. 연구실마다 학부생에게 요구하는 건 천차만별이지만, 그냥 대학원생들과 함께 스터디를 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 종강하고 며칠 뒤에 교수님께 찾아가 간단한 안내를 받았다. 나는 이제 교수님이 정해주신 책을 대학원생들과 함께 읽어야 한다. 책을 그냥 읽기만 하는 건 아니고, 책에서 배운 내용을 정리해서 발표해야 한다. 매주 열리는 세미나에서 우리는 두 명씩 돌아가면서 발표하기로 했다. 결국 방학에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소리다. 덕분에 나는 방학 중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만큼 재미있긴 했지만.


"이번 주도 다들 준비하느라 고생했어. 다음 주에 이번 챕터는 다 끝내는 걸로 하자."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멘트가 나오자 나는 빠르게 책과 노트를 가방 안에 넣었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피로감이 올라와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다. 착실한 건지 게으른 건지 모를 이런 나와는 대비되게, 한 대학원생이 교수님께 말을 꺼냈다. 후드티 차림에 안경을 쓰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학생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나보다 두 학번 정도 선배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교수님, 저 질문드릴 게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아, 그래? 잠깐이라면 괜찮아."

그녀는 세미나가 끝나고 혼자 마지막까지 남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늘처럼 질문이 있다고 하거나, 끝나고 바로 교수님과 면담을 잡거나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주 열성적인 대학원생인 모양이다. 나도 대학원에 들어가면 저렇게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세미나실을 나섰다. 오늘은 학과 사무실까지 들러야 해서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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